한국의 메디치가 지향한 '궁극의 공간'..전설 넘어 새 '문화 요람' 될 수 있을까 [콘크리트와 글로 빚은 20세기 한국 건축 (2)]

박정현 건축비평가 2021. 10. 4. 2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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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가 김수근의 '공간사옥'

[경향신문]

김수근의 문방이 있던 공간. 현재는 집기가 치워져 애초 정서를 느끼긴 어렵다(위 사진). 담쟁이넝쿨에 뒤덮인 구 공간사옥 외관. 뒤로 북촌의 한옥이 보인다. 박정현 제공·권도현 기자
20세기 한국 건축의 중심 김수근
사무소·창간 잡지 이름 모두 ‘공간’
1971년 세운 ‘공간사옥’ 건축의 신화

다소 과장해서 말하면, 지난 세기 한국 건축은 공간이라는 단어를 중심으로 공전했다. 먼저 삼중의 고유명사인 ‘공간’이 있다. 첫 번째로 설계사무소 ‘공간’이다. 박정희 정권의 그늘이 깊게 드리워 있다는 부정적인 평가에도 불구하고 공간의 설립자 김수근이 20세기 한국에서 가장 중요한 건축가라는 데에 이의를 제기하기는 힘들다. 공간은 수많은 건축물뿐 아니라 여러 뛰어난 건축가들의 산실이었다. 윤승중, 유걸, 김원, 김석철, 김원석, 장세양, 승효상 등은 모두 공간에 둥지를 틀고 건축가로서 입지를 다져나갔다.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설계사무소 공간을 김수근이라는 단일한 이름으로 환원해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건축 작업은 개인의 이름으로 정리되는 공동의 노력이다. 공간의 여러 작품에도 당연히 해당된다. 두 번째는 잡지 ‘공간’이다. 1966년 11월에 창간된 이 잡지는 글을 쓰고 사진을 찍고 원고를 편집하는 당시의 역량과 출판 상황을 고려하면 기적에 가깝다. 이후 지금까지 발행되며 정보를 실어 나르고 있는 ‘공간’이라는 매체를 빼놓고 한국 현대 건축을 이야기하기란 불가능하다. 마지막 세 번째는 종로구 원서동에 자리한 공간사옥이다. 이곳은 문화의 요람이었다. 공간이 전국에 세운 수많은 작업이 만들어진 곳이자 황병기의 가야금, 홍신자의 무용, 공옥진의 춤, 김덕수의 사물놀이 같은 예술을 통해 전통과 현대가 만난 자리다. 잘 알려진 대로 1977년 미국의 주간지 ‘타임’이 김수근을 소개하면서 “서울의 로렌초 메디치”라고 언급했다. 예술가 미켈란젤로가 아니라 후원자 메디치로 호명했을 정도로 공간은 한국 문화의 인큐베이터였다. 이렇게 20세기 한국 건축계를 좋은 의미에서든, 나쁜 의미에서든 지배한 공간의 삼위일체가 완성된다. 여기서 자유로운 건축가와 역사가, 비평가는 없다 해도 지나치지 않다.

1970년대 초 한옥에 둘러싸인 공간사옥 일대.
건축작업 싹트고 예술이 교류하며
창작·정신을 아우르는 ‘인간적 공간’
그 ‘공간’엔 그의 건축정신이 있다

설계사무소 이름과 잡지 제호에 공간을 사용할 만큼 김수근은 ‘공간’을 핵심 키워드로 삼았다. 아쉽게도 사무소명과 제호로 공간을 삼은 이유에 대해 김수근이나 공간의 다른 건축가들이 분명하게 설명한 적이 없다. 공간의 중요성은 암묵적인 전제나 다름없었다. 대신 그들이 남긴 건물에서 그 의미를 추적해볼 수 있다. 그들이 지향한 공간은 다름 아닌 공간사옥에서 구현되었다. 공간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서로의 의미를 강화한다.

1971년부터 점차적으로 완공된 ‘공간사옥’은 그 장소에 얽힌 여러 예술가들의 이야기를 제외하고도 신화로 불리기에 충분하다. 최고의 현대 건축물을 선정하는 투표에서 첫 번째 자리는 거의 언제나 공간사옥이다. 일례로, 2013년 동아일보와 ‘공간’이 함께 조사한 ‘한국 현대건축 명작’에서 넉넉한 차이로 1위에 올랐다. 참고로 2위는 또 다른 전설인 김중업의 프랑스대사관이다. 대다수 건축 비평가와 역사학자들은 공간사옥을 한국 건축의 최대 성과 중 하나로 평가하는 데 주저하지 않는다. 여기에는 김수근의 개인적인 서사가 더해져 있다.

건축가 김수근은 1960년대 내내 국영 엔지니어링 회사인 한국종합기술개발공사의 주역으로 활동했다. 세운상가, 여의도마스터플랜, 오사카 엑스포70 한국관 등 3공화국의 경제개발을 과시하고 국가 정체성을 확립하기 위한 국가 프로젝트를 도맡았다. 프로젝트의 규모는 더할 나위 없이 컸지만 국가를 대변해야 하는 사업 속에서 개인의 자리는 크지 않았으며, 1969년 자신의 사무실을 열고 억눌러온 예술의지를 마음껏 발현해 탄생시킨 소박한 걸작이 공간사옥이라는 신화다. 여기에 한국전쟁 중 일본 밀항과 유학, 부여박물관 왜색논쟁으로 정체성을 의심받았으나, 미술사학자 최순우를 만나 한국적인 아름다움에 새로이 눈떴다는 에피소드가 더해진다. 관료체제와 불화하는 낭만주의적 예술가, 진정한 자아 찾기라는 예술가를 위한 전형적인 서사가 완성되는 것이다. 이는 공간사옥을 휘감고 있는 담쟁이넝쿨처럼 이 건물과 떼어놓을 수 없다. 불과 4년밖에 차이가 나지 않지만, 세운상가와 공간사옥은 같은 건축가의 작업이라고 보기 어려울 정도로 다르다. 도시를 장악하는 거대한 규모의 콘크리트 더미와 앞뒤 좌우에 한옥이 들어서 있는 북촌에 소박하게 자리한 벽돌 건물의 차이는 김수근과 함께한 건축가의 차이이기도 하다. 세운상가에서는 대형 국가 프로젝트 위주로 작업 목록을 채워간 윤승중의 역할이 컸다. 반면 공간사옥과 함께 시작한 공간의 벽돌 시대에는 김원석이 중추적인 자리를 맡았다.

공간사옥의 탁월함을 말하는 이들이 예외 없이 언급하는 장점은 ‘공간’이다. 인간적인 공간, 시각적 대상이 아니라 온몸으로 느낄 수 있는 감각적인 공간, 한국 전통 건축의 공간적 특성이 압축된 공간 등등이다. 결국 공간사옥의 탁월함에 대한 질문은 김수근과 그의 팀이 추구한 공간의 의미로 되돌아오게 된다. 김수근은 잡지를 창간한 지 14년, 공간사옥을 지은 지 9년이 지난 1980년, 자신이 지향하는 공간을 “궁극의 공간”으로 설명한 바 있다. 그에 따르면 궁극의 공간은 “인간적인 공간 … 그것은 창작활동을 위한 공간, 조용히 명상하는 공간, 인간의 정신생활을 풍부하게 해주는 여유의 공간”이다. 이를 가장 잘 드러내는 사례로, 전통건축의 ‘문방(文房·문필가들이 책을 쌓아두고 읽는 방)’을 꼽았다. 실제로 공간사옥 3층에는 병풍, 들창, 전통 가구를 갖추고 마루가 깔린 김수근의 문방이 있었다. 그러나 전통건축에서나, 공간사옥에서나 문방은 그 방을 점하는 이의 사용 방식이나 마음가짐에 달린 것이지, 건축물에 의해 물리적으로 규정되는 것이 아니다. 결국 김수근이 재확인한 것은 사상적이고 철학적인 태도였다.

그런데 공간은 한국뿐 아니라 20세기 건축 전체의 핵심 키워드였다. 건축물을 만드는 일은 결국 사람들이 쉬고, 일하고, 즐길 수 있도록 실내 공간을 만들어내는 것이니, 공간이 건축의 목적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공간 자체가 관심의 대상으로 부상한 때는 인류의 역사와 나란히 하는 건축의 연대기에서 아주 최근의 일이다.

수천년 동안 건축가들이 제도판 위에서 선을 그을 때, 나무로 모형을 만들 때, 머릿속에 먼저 떠올린 것은 공간이 아니라 벽과 기둥의 윤곽선이었다. 고대 그리스, 르네상스를 거쳐 19세기 신고전주의에 이르기까지 서구 건축의 성패는 ‘정교한 윤곽선이 빚어내는 기둥과 벽의 비례’였다. 공간은 비례 잡힌 질서 체계가 만들어지고 나서 생기는 부산물이었다. 실내 공간은 전혀 없어도 바위에 새겨진 고전주의 기둥은 건축이라고 부르지만, 사람이 기거할 수 있는 공간(자리)이 있음에도 동굴을 건축으로 부르지 않는 이유와 같다. 한국에서도 사정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목수들의 관심은 목재의 결구(結構)와 지붕의 선이었지 건축물 내부의 공간이나 여러 채의 건물로 이루어진 외부 공간 자체가 아니었다. 서양이든 동양이든, 건축가든 목수든, 텅 비어 아무것도 없는 공간이 아니라 만질 수 있는 벽이나 기둥을 만드는 이들이었기에 당연한 일이었다.

공간은 19세기 말 20세기 초 오랜 시간 건축의 핵심이라고 여겼던 형태 탐닉에 대한 해독제로 등장했다. 철 구조물과 철근 콘크리트는 벽과 아치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얇은 부재를 이용해 건물을 지을 수 있도록 해주었다. 기둥과 바닥판이 건물 전체 뼈대를 완성하고 나면 벽은 어떠한 하중도 부담할 필요가 없다. 이로써 그동안 벽에 갇혀 있던 공간이 서로 연결되기 시작한다. 현대 건축은 바로 이 지점에서 새로운 가능성을 엿보았다. 구조물을 통과해서 이어지는 공간의 흐름, 이를 관통하는 시선의 확장이다.

르코르뷔지에는 이 공간을 안에서부터 부풀어 오르는 거품에 비유했다. 현대 건축을 전 세계로 확산되도록 하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한 현대건축국제회의를 주도한 건축역사학자 기디온은 일찍이 에펠탑과 같은 새로운 구조물이 선사한 경이로운 시선을 예민하게 포착했다. 이어 1941년 <시간, 공간, 건축>을 집필함으로써 공간을 현대 건축의 첫째 가는 개념으로 성문화했다. 여기서 공간은 관통하고 흐르는 것, 투명한 것이었다. 이를 가능하게 하는 물질적 조건은 가능한 한 얇고 가볍게 기둥과 바닥을 만들어내는 철근 콘크리트와 철골 구조였다. 서구의 모더니즘은 기술적 성취를 딛고 섰다.

올해로 건립 50주년 맞은 공간사옥
바뀐 환경·사그라드는 기억과 담론 속
‘새로운 눈’으로 읽어야 풍요로워져

분명한 것은 공간사옥의 공간이 모더니즘 건축의 핵심이라 평가되는 공간과 꽤 다르다는 사실이다. 공간사옥은 기둥과 바닥판으로 이루어진 건물이 아니다. 두 개의 벽으로 분명하게 구획된 공간사옥의 공간은 개방적이고 유동적이기보다 폐쇄적이고 정적이다. 또 시선을 바깥으로 이끌지도 않는다. 엇갈린 층과 미로 같은 내부 동선, 수시로 변하는 바닥 높이와 좁은 계단 덕에 방문객의 시선은 바닥과 벽으로 향한다. 덕분에 이곳을 찾은 이들은 붉은 벽돌의 강한 질감에 더욱 두드러진 인상을 받는다. 이런 경험이 흔치 않다는 것은 틀림없지만, 공간사옥을 곧장 20세기 최고의 한국 건축으로 만들어주지는 않는다.

올해로 공간사옥은 50주년을 맞는다. 주위에 가득하던 한옥들은 이미 오래전에 사라졌고, 공간사옥은 2013년 매각되어 미술관으로 바뀌었다. 현대 미술작품과 어색하게 공존하고 있는 지금의 공간사옥에서 김수근이 말한 ‘궁극의 공간’의 기운을 감지하기란 힘들다. 김수근의 집기가 모두 치워진 곳에서 문방과 문인의 정서를 느끼기도 불가능에 가깝다. 기존의 기억과 담론이 눈에 띄게 사그라들고 있는 지금, 우리는 공간사옥을 새로운 눈으로 읽고 해석해야 한다. 공간, 아니 모든 문화의 유산은 기존 신화를 그대로 답습하지 않고 매번 새롭게 읽어내, 여기서 새로운 창작의 가능성을 찾을 때 더 풍요로워진다. 더구나 공간사옥은 여전히 활용되는 살아있는 건축물이니 말이다. 앞으로 50년 뒤, 공간사옥이 지금과 같은 위상을 누릴지는 누적된 전설이 아니라 써나갈 이야기에 달렸다.

■박정현



서울시립대학교 건축학과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건축은 무엇을 했는가: 발전국가 시기 한국 현대 건축>을 비롯해 <김정철과 정림건축>(편저), <전환기의 한국 건축과 4.3그룹>(공저) 등을 쓰고, <포트폴리오와 다이어그램> <건축의 고전적 언어> 등을 번역했다.

2018년 베니스 비엔날레 한국관 ‘국가 아방가르드의 유령’ 등의 전시에 큐레이터로 참여했다. 현재 도서출판 마티에서 편집장으로 일하며 건축 비평가로 활동 중이다.

<박정현 건축비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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