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화 "천천히 오래도록..내 연기는 거북이걸음 같아"

송주희 기자 2021. 10. 4. 17:43
음성재생 설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47년 연기인생' 아카이브로 돌아보는 윤석화
1975년 데뷔 매체·장르 넘나들며
화려함·외로움 모두 경험한 시간
'연기인생 고향' 소극장 산울림서
대표작 엮어 연극 무대로 재구성
배우·인간 윤석화의 삶 되돌아봐
오는 20일부터 소극장 산울림에서 주요 대표작을 엮은 공연 ‘윤석화 아카이브 자화상I'을 선보이는 배우 윤석화/사진=오승현
[서울경제]

돌(石) 틈에서 꽃(花) 피우듯 묵묵히, 씩씩하게 걸어온 시간이었다. 어느 땐 화려했지만, 척박한 환경 속에 외롭고 괴로운 순간도 많았다. 1975년 연극 ‘꿀맛’으로 데뷔한 뒤 40년 넘게 매체와 장르를 넘나들며 활약해 온 배우 윤석화(사진). 그가 오는 10월 소극장 산울림에서 특별한 기획으로 관객과 만난다. 소극장 산울림과 함께 한 대표작의 명장면을 엮어 재구성한 ‘윤석화 아카이브 자화상I’을 통해서다. 연출·구성·출연의 1인 3역을 도맡은 그는 본인의 무대 위 삶을 되돌아보며 배우 윤석화, 그리고 인간 윤석화를 마주한다.

“젊고 새로운 것에 연연하는 세상이지만, 나는 거북이 같은 걸음으로 내가 할 수 있는 연기를 합니다” 지난 1일 마포구 산울림에서 만난 윤석화는 여전히 아름다웠다. 작품을 말할 때 빛나는 눈동자, 미소가 만들어내는 눈가와 입가의 옅은 주름까지, 천생 배우가 수십 년 쌓아온 관록은 얼굴에 몸짓에 그대로 배어 났고, 젊음으로도 새로움으로도 결코 대체할 수 없는 깊은 향기를 내뿜었다.

윤석화의 아름다움을 만나볼 수 있는 이번 공연은 배우 개인의 연기 역사를 정리하는 것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언제고 작품을 통해 걸어온 길을 되돌아보고 싶었던 그는 어려움 속에서도 연극 정신을 지켜온 산울림에서 ‘윤석화 아카이브’의 첫 작업을 펼치기로 했다. 아버지요, 큰 오빠 같은 산울림의 임영웅 연출에 대한 감사의 마음을 전하기 위해서다. 윤석화는 “이곳에서 빛났던 작품들과 그 무대를 살려내고 싶었다”며 “관객들이 조금이라도 이 극장의 존재 이유와 역사성을 함께 나누길 바란다”고 말했다.

오는 20일부터 소극장 산울림에서 주요 대표작을 엮은 공연 ‘윤석화 아카이브 자화상I'을 선보이는 배우 윤석화/사진=오승현

윤석화에게 산울림은 연기 인생의 고향 같은 곳이다. 1988년 ‘하나를 위한 이중주’로 처음 산울림의 무대에 섰던 윤석화는 그 후 다양한 작품을 통해 ‘산울림의 황금기’를 이끈 주역이다. 이번 아카이브 자화상I에서 선보일 작품은 총 세 편. ‘하나를 위한 이중주’와 임영웅 연출과의 첫 작업이었던 ‘목소리’(1989) 그리고 장기 공연의 신화를 이끌어낸 ‘딸에게 보내는 편지’(1992)다. 하나를 위한 이중주는 1980년대 윤석화가 미국 유학 시절 대본을 보고 매료돼 산울림에 먼저 공연을 제안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당시에 저는 좋은 작품에 목말라하면서도 생계를 걱정하는 절망적인 상황이었어요. 그때 최정상의 음악가가 불치병을 마주하며 새로운 인생을 찾아가는 이 이야기가 눈에 들어왔죠. 저에겐 구원과도 같은 작품이었어요.” ‘네까짓 게 무슨’이란 불호령도 각오하고 건넨 제안에 호랑이 선생님(임영웅)은 “좋다”고 화답했고, 주연에 번역까지 도맡은 윤석화는 관객과 평단의 호평 속에 ‘산울림과의 아름다운 첫 인연’을 시작했다. 전화기 하나에만 의존한 채 여배우 한 명이 오롯이 무대를 감당해야 했던 ‘목소리’, 단 한 번의 암전도 없이 90분 동안 연기와 노래를 펼쳐낸 ‘딸에게 보내는 편지’까지. 의미 있지만, 셋 모두 “내가 미쳤지”라는 혼잣말이 수시로 튀어나올 만큼 어려운 작품들이다. 윤석화는 “할 수 있다며 ‘저지른 것’에 대해 일단 감사하게 생각한다”면서도 “50년 가까이 연기를 해왔지만, 살 떨리고 악몽까지 꾼다”며 부담감을 토로했다.

관객에게 배우는 수많은 얼굴로 기억된다. 윤석화 역시 비밀을 간직한 수녀(신의 아그네스)와 강인한 소프라노(마스터 클래스), 비운의 조선의 국모(명성황후)와 마지막 황녀(덕혜옹주)에 이르기까지 시대도 상황도 다른 ‘그 시간의 누군가’로 무대에 올랐다. 나 아닌 타인의 삶으로 기억되는 작업이 외로울 법도 하지만, 반 백 년 내공의 배우는 “수많은 역할을 통해 오늘의 내가 있다”는, 천의 얼굴다운 답변을 내놓았다. 막 내리고, 관객 떠난 무대에선 수시로 외로움이 밀려오지만, 작품과 배역으로 관객에게 질문을 던지는 매일의 삶 그 자체가 윤석화가 계속 지켜나가고 싶은 ‘자화상’이라는 것이다.

오는 20일부터 소극장 산울림에서 주요 대표작을 엮은 공연 ‘윤석화 아카이브 자화상I'을 선보이는 배우 윤석화/사진=오승현

인터뷰 도중 윤석화는 의자에서 일어서 ‘하나를 위한 이중주’의 대사를 읊었다. “음악은 마법입니다. 음악은 어떤 속임수도 쓰지 않는 가장 진실한 것입니다.” 잠시 숨을 고른 그는 이렇게 말했다. “(대사 속 음악에 해당하는) 이게 나한텐 다 연극이에요. 그렇게 되길 소망하면서 여기까지 왔고, 죽을 때까지 그걸 꿈꿀 거예요.”

오는 20일부터 11월 21일까지 산울림에서 펼쳐질 이번 공연에는 박정자, 손숙, 박상원, 최정원, 송일국 등 동료 배우들이 ‘일일 하우스 매니저’로 참여해 힘을 보탠다. 윤석화는 이번 아카이브 자화상 산울림 편 이후 예술의전당·사라진 극장 편으로 대표 작품과 함께 관객을 만날 예정이다.

송주희 기자 ssong@sedaily.com사진=오승현 기자 story@sedaily.com

Copyright © 서울경제.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