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설의 복서냐, 두테르테 딸이냐..필리핀 대선 레이스 안갯속 개막

조기원 2021. 10. 4. 17: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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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테르테 딸 여론조사 선호도 1위
아버지와 닮은 스타일과 경력
후계자 인식되지만 아직 출마 의사 안 밝혀
8체급 석권 파키아오 후보 등록
여론조사 4위지만 최근 상승세
두테르테 지지자에서 비판자로 돌아서
2019년 로드리고 두테르테(왼쪽) 필리핀 대통령이 일본 도쿄를 방문했을 때 딸 사라(오른쪽)와 동행한 모습. 로이터 연합뉴스

두테르테 대통령의 딸, 필리핀을 대표하는 ‘전설적 복서’, 독재자의 아들, 빈민가 출신의 마닐라시 시장….

최근 대선 후보자 등록 절차 시작으로 막이 오른 필리핀 대선 레이스 유력 주자들의 면면이다. 내년 5월 대선 투표를 앞두고 필리핀 선거관리위원회는 오늘 8일까지 후보자 등록 신청을 받는다. 현재 필리핀 내에서 가장 주목을 받는 이는 아직 입후보 의사를 밝히지 않고 있는 로드리고 두테르테 대통령의 딸 사라 두테르테 카르피오(43) 다바오시 시장이다.

사라 시장은 지난해 12월 이후 대선 후보 선호도 여론조사에서 한번도 1위를 놓친 적이 없다. 지난달 6~11일 필리핀 여론조사 기관인 펄스 아시아가 유권자 2400명을 대상으로 한 여론조사에서도, 지지율 20%로 1위를 지켰다. 사라 시장은 지난 2일에는 대선 후보 등록 대신 다바오 시장 연임을 위한 후보 등록까지 마쳤지만, 마지막 순간에 마음을 바꿔 대선 레이스에 뛰어들 수 있다는 관측은 여전히 많다. 필리핀 선거법상 대통령 후보 등록을 하지 않은 이도 11월15일까지는 사퇴하는 다른 후보자를 대체하는 형식으로 선거에 나설 수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아버지인 두테르테 대통령이 2015년에 사퇴한 후보자를 대체하는 방식으로 대선 레이스에 뛰어들어 당선됐다. 두테르테 대통령이 2일 부통령 출마 포기 선언을 한 것도 딸인 사라의 출마를 위한 포석이라는 관측이 많다. 두테르테 대통령은 출마 포기 선언을 하며, 딸이 대선에 출마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내비쳤다. 지지자들은 “가자, 사라”라는 펼침막을 내걸며 대선 도전을 요구하고 있다.

사라 두테르테 다바오시 시장이 2011년 법원 공무원에게 주먹을 날리는 모습. 유튜브 갈무리

사라 시장은 정치 스타일과 경력 모든 면에서 아버지를 닮아 화끈하다. 2011년 다바오시 시장이었던 그는 철거가 예정된 다바오시 안에 있는 슬럼가를 공개 방문했다. 법원 공무원에게 철거를 늦춰달라고 요구했으나 거절당하자,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법원 공무원에게 주먹을 여러 차례 날렸다. 2015년에는 아버지의 대선 출마를 촉구하며 삭발을 한 적도 있다. 인스타그램에는 점퍼를 입고 오토바이를 타고 있는 사진이 여러 장 올라와 있다.

사라 시장은 이전부터 아버지의 정치적 후계자 역할을 해왔다. 2007년 다바오시 부시장으로 당선돼 시장이던 아버지와 함께 일했다. 아버지가 2010년 3회 연임 제한 규정에 걸려 시장 출마가 불가능해지자, 자신이 직접 출마해 당선됐다. 2013년 아버지가 시장으로 돌아온 뒤엔 부시장으로 내려왔다. 이후 아버지가 대통령으로 취임한 2016년 다시 시장 자리를 차지했다. 부녀가 다바오시 시장을 맡은 햇수를 합쳐보면 31년이다. 대통령 6년 단임제 헌법 규정 때문에 재선 길이 막힌 두테르테 대통령이 딸을 내세워 중앙정부에서도 비슷한 방식으로 권력을 유지하려 한다는 관측이 끊이지 않는 이유다.

최근 대선 입후보를 한 매니 파키아오 상원의원. 로이터 연합뉴스

두테르테 부녀에 맞서 ‘다크호스’로 떠오른 이는 세계 최초 8체급 석권 기록을 세운 전설적 복서이자 필리핀의 영웅인 매니 파키아오(43) 상원의원이다. 그는 두테르테 대통령이 속한 여당인 ‘필리핀 민주당-인민의 힘’(이하 필리핀 민주당) 소속이지만 최근 대선 후보 등록 신청서를 냈다. 그는 “나는 파이터였고 링 안과 밖에서 앞으로도 계속 파이터일 것”이라며 권투선수다운 출사표를 냈다.

그 때문인지 한때 친밀했던 파키아오와 두테르테 대통령의 관계는 최근 급격히 악화됐다. 정권 초반이었던 2016년 파키아오는 두테르테 대통령이 추진한 정책인 ‘마약과의 전쟁’의 지지자였고, 두테르테 대통령도 파키아오를 “대통령이 될 사람”이라며 추어올렸다. 그러나 올해 들어 파키아오가 두테르테 정부의 부패 의혹을 제기하고 친중국 대외정책을 비판하며 관계가 급속히 어색해졌다. 두테르테 대통령은 지난 7월 파키아오를 겨냥해 “펀치 드렁크(머리를 가격당한 충격이 쌓여 권투선수 뇌세포가 손상을 입는 것)를 앓고 있다”고 말하며 불편한 심기를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파키아오 후보 추대는 필리핀 민주당 내 파키아오 계파가 주도했고, 두테르테 계파는 지지 의사를 아직 밝히지 않고 있다. 파키아오는 9월 여론조사에서 선호도 4위(12%)에 그쳤으나 지지율은 상승세를 타고 있다.

이 밖에 필리핀을 20년간 철권 통치했던 페르디난드 마르코스 전 대통령의 아들과 빈민가 출신의 입지전적 인물인 마닐라시 시장도 주요 후보군이다. 마르코스 전 대통령의 아들인 봉봉 마르코스(64)는 지난달 여론조사에서 선호도 2위(15%)를 기록했다. 그는 지난달 초 두테르테 대통령의 딸 사라와 러닝메이트로 대선에 출마할 수 있느냐는 질문에 “모든 것이 가능하다”고 말했다고 필리핀 현지 <인콰이어러>가 전했다. 다만 출마 의사를 아직 명확히 밝히지는 않았다. 수도 마닐라시의 시장인 이스코 모레노 도마고소(47)는 여론조사 3위를 기록했으며 대선 도전 의사를 밝혔다. 마닐라 빈민가 출신인 그는 배우로 이름을 알린 뒤 정계에 입문했다.

조기원 기자 garde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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