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길 칼럼] 유럽 조락의 정치인, 메르켈의 퇴장

정의길 2021. 10. 4. 16: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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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길 칼럼]대화, 설득, 타협, 인내, 합의, 관용은 메르켈을 상징하는 리더십이다. 이런 리더십은 유럽의 표류와 조락이라는 상황의 산물이다. 메르켈마저 떠나는 유럽은 이제 어디로 갈 것인가.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가 2018년 6월9일 캐나다에서 열린 주요 7개국(G7) 정상회의 도중 손으로 탁자를 짚은 채, 팔짱을 낀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얘기하고 있다. 메르켈 총리 인스타그램 캡처 / 연합뉴스

정의길 국제부 선임기자

16년의 집권을 마치는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는 유럽의 ‘표류와 조락’의 정치인이다. 메르켈 때문에 유럽이 표류하고 조락했다는 의미가 아니다. 유럽의 표류와 조락에서 나온 정치인이 메르켈이라는 얘기다.

따지고 보면, 메르켈은 새것을 만들고 더한 것이 아니었다. 무너져 내리고 약화되는 기존의 것을 파국으로 치닫지 않게 관리했다. 2008년 세계 금융위기로 악화된 유럽의 부채 위기, 중동 분쟁으로 인한 난민 위기, 러시아의 크림반도 합병과 우크라이나 내전, 영국의 유럽연합 탈퇴, 도널드 트럼프 미국 행정부 출범 이후 ‘대서양 양안 동맹’ 약화, 트럼프의 이란국제핵협정 탈퇴 등이 메르켈 재임 동안 벌어졌다. 메르켈은 독일과 유럽을 이 위기의 파고에서 침몰하지 않게 했으나, 그 파고에서 몸이 젖는 것을 피할 수는 없었다.

2차대전 패전 직후 독일 총리인 콘라트 아데나워는 서독을 미국이 주도하는 서방 동맹의 일원으로 굳건히 자리매김시켜서, 자유롭고 평화로운 독일 부흥의 기초를 닦았다. 빌리 브란트는 동방정책을 펼쳐서 미-소 냉전 상황에서 독일과 유럽의 독자적 위상을 회복했다. 헬무트 콜은 적극적인 유럽 통합과 함께 독일 통일을 결단하고 주도했다. 이들은 2차대전으로 자멸한 독일과 유럽을 새롭게 회생시키는 역할을 했다.

하지만 독일과 유럽은 거기서 더 진전하지 못하고 있다. 유럽연합 출범 이후 유럽 통합은 한계에 봉착하다가, 영국이 유럽연합에서 탈퇴했다. 유럽연합 확대 정책은 우크라이나 가입을 놓고 러시아의 반대에 직면하다가 결국 내전으로까지 비화됐다. 유럽연합은 유럽 통합이 아니라 분열의 고리로 바뀌었다. 유럽연합을 반대하는 극우민족주의 정당이 유럽 전역에서 득세해 오고 있다. 프랑스에서 극우민족주의 정당 국민연합은 그 후보가 대선 결선투표에 오르고 제2당을 넘본다.

이 때문에 프랑스나 독일에서 기존의 좌우 주류 정당들은 독자적인 집권 능력을 상실하고 있다. 메르켈의 16년 집권 동안 12년이 주류 좌우파 정당인 기민련과 사민당의 대연정이었다. 대타협과 합의의 결과로 긍정적으로 볼 수도 있지만, 기존 주류 좌우 정당이 단독으로는 집권할 지지와 능력이 축소되고, 국민들 사이에서는 그 정체성 차이도 없어졌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지난 9월26일 치러진 독일 총선에서도 사민당과 기민련은 각각 25% 내외의 전후 최저 득표율을 보였다. 지난한 연정 구성이 예상되는 가운데 또다시 대연정의 가능성도 배제하지 못하고 있다.

무엇보다도 국제 지정학에서 이제 유럽은 주요 플레이어에서 완전히 탈락했다. 전후 유럽의 지정학적 지위는 인류 역사상 최강·최대 군사동맹체인 나토로 규정된다. 헤이스팅스 이즈메이 초대 나토 사무총장은 나토가 “소련을 막고, 미국을 개입시키고, 독일을 억누르기 위해” 만들어졌다고 명쾌하게 규정했다. 전후 자본주의 진영의 최대 위협인 소련을 막기 위한 미국 주도의 동맹을 만들려면, 유럽 내 지정학적 경쟁의 근원인 독일을 제어하고 유럽의 단결을 담보하는 장치가 필요했고 그게 나토였다.

미국은 이제 유럽에 안보를 책임져주고 동맹을 구하려고 하지 않는다. 러시아의 위협이 사라진 것은 아니나, 태평양 지역에서 중국의 부상과 위협이 미국에는 더 절박하기 때문이다.

트럼프 전 대통령이 나토 무용론과 탈퇴까지 시사한 것은 트럼프 특유의 미국 일방주의만은 아니었다. 최근 미국-영국-오스트레일리아의 ‘오커스 동맹’ 조약의 일방적인 발표로 오스트레일리아와의 잠수함 건조·수출 계약이 취소된 프랑스의 분노는 유럽의 곤궁한 처지를 대변한다. 브렉시트로 미국에 유럽의 유용성은 더욱 희석됐다. 오커스 동맹에서 보듯이 영어권 국가들이 앵글로 블록 강화로 서방세계를 갈라치기하려는 의도도 보인다.

메르켈은 트럼프가 취임한 직후인 2017년 5월 “우리는 유럽인으로서 우리 운명을 위해 스스로 싸워야만 한다”고 미국으로부터 유럽 독립 선언에 준하는 ‘폭탄 발언’을 했다. 하지만 유럽의 홀로서기가 진전된 것은 아무것도 없다.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은 유럽연합군 창설 등 유럽의 전략적 자치를 주장하나 현재로서는 공염불에 불과하다.

분명 메르켈은 16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독일과 유럽을 이끌며 안정과 번영을 지켜온 정치인이었다. 대화, 설득, 타협, 인내, 합의, 관용의 리더십은 그의 재임 기간 중 독일과 유럽이 직면했던 상황의 산물이다. 유럽의 표류와 조락은 유럽의 책임이 아니고 다만 역사의 추가 바뀌었기 때문이다. 메르켈마저 떠나는 유럽은 이제 어디로 갈 것인가.

Egi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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