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모두가 D.P.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방영에 앞서 웹툰을 본 이들은 모두 알겠지만, 원작의 제목은 <D.P. 개의 날>이다. 한마디로 군 생활을 ‘개의 날’이라고 선언하는 문제작이다. 일찍이 <용서받지 못한 자>(2005)가 군대의 부조리함을 고발한 것처럼 그간 군대 문제를 다룬 작품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쉽게 잊어졌다. 한동안 <태양의 후예>나 <사랑의 불시착>처럼 군인을 히어로이자 만인의 연인으로 묘사하는 밀리터리 드라마가 주류를 이루었다면, 그런 환상에서 벗어나기 위해선 ‘슬기로운 군 생활’로 타협하는 것이 아니라 반대편에 서서 군 문화의 진실과 감추어진 이면을 드러내는 시도가 반드시 필요했다. 작품의 완성도를 떠나서 <D.P.>의 출현은 숙명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건 마치 웨스턴 장르가 과잉적인 오락성을 추구한 마카로니 웨스턴을 거쳐 스스로를 반성하고 성찰하는 수정주의 웨스턴(혹은 포스트 웨스턴)에 도착한 것과 다르지 않다. <D.P.>의 가치를 평가하자면 새로운 밀리터리 드라마의 시대를 선도한 것으로 충분하다. 술자리에서 고성방가로 울려 펴지는 군대의 실상이 아니라, 우리가 함께 숨쉬는 일상 속에서 공론화한 사례로 기억될 것이다.
많은 남성들이 <D.P.>를 보며 자신의 섬뜩한 군 생활을 떠올렸겠지만, 사적인 기억과 무관하게 드라마의 완성도를 높였다는 차원에서 두 가지 장면이 인상적이다. D.P. 선임이 후임인 주인공 준호(정해인)에게 군무 이탈 체포조인 D.P.가 무엇의 약자인지 묻는다. 답을 맞히지 못한다. 선임은 아무도 모를 거라고 너스레를 떤다. 아이러니하게도, D.P.라는 보직의 이름은 진실을 알려고 하지 않는 관습이나 금기가 군대에 존재한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또 하나는 술에 취해 탈영병에게 자살 도구(라이터)를 빌려주는 바람에 준호가 원죄처럼 죄의식을 갖고 살 수밖에 없는 장면이다. 선임에게 괴롭힘을 당하던 준호는 탈영병을 데려오라는 명령을 받는다. 당연하게 받아들이지만 어린 군인 두 명이 탈영병을 잡는 임무를 맡는 것 자체가 군대에서 일어나는 가혹 행위만큼 강압적이다. 이 과정에서 누구나 가해자나 피해자가 될 수 있는 일이다(내년 7월에는 D.P.가 사라진다). 주요 언론을 살펴보면, D.P. 출신들이 드라마를 보고 나서 고증이 잘됐다고 평가하는 것을 쉽게 볼 수 있다. 하지만 드라마와 현실의 싱크로율에 집착할 뿐 정작 D.P.는 군대가 잉태한 폭력 문화라는 것을 지적하지 않는다(그런 의미에서 D.P.를 PTSD라고 읽어야 마땅하다).
으레 남자들끼리 모인 술자리에서 안줏거리가 떨어지면 바퀴벌레가 슬슬 기어 나오듯 군대 얘기가 시작된다. 이런 상황을 영화로 비유하자면 유령이나 좀비가 나오는 호러에 가깝다. 억압된 것이 회귀하듯 수컷이 모이면 군바리는 돌아온다. 국방의 의무를 충실히 수행한 남자들을 폄훼할 의도는 전혀 없지만, 상당수 남자들의 군대 이야기는 허세이거나 현실 도피에 가깝다. 전자는 군대에서 잃어버린 시간에 대한 보상 심리를 작동시키고, 후자는 <에반게리온>의 AT필드(방어막)에 견줄 만한 방어 기제를 드러낸다. 즉 왁자지껄하게 떠벌리거나 입을 다물고 침묵한다. 타임머신을 타고 군대로 돌아가듯 이들은 벌거벗은 삶으로 회귀한다. 어쩌면 느리게 흘러가는 국방부 시계 속에 고착되어버린 것은 아닐까. 많은 이들이 군대의 상처에서 쉽게 벗어나지 못한다. 그렇게 상처 입은 마음을 품은 채 살아간다. 약간의 과장을 덧붙이자면, 마치 애도에 실패한 사람들처럼 군대의 과거를 떠나보내지 못한다. 애도를 통해 개의 날을 떠나 보내지 못한 자들은 <사랑의 블랙홀>(1993)의 타임 루프처럼 되돌이표를 무한 반복한다.
<D.P.> 신드롬이 일어나자 국방부는 “<D.P.>가 과장”이라고 논평을 했고, 그러자마자 해군 일병이 극단적 선택을 하는 일이 벌어졌다. 국방부는 여전히 시대착오적인 논리로 군대를 포장한다. 국방부의 발표는 언제나 공감할 수 없고 위화감을 느낄 뿐이다. 군대의 경직성을 경험한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듯이, 그들이 스스로 부조리를 척결할 것이라 기대할 수 없다. 예전과 비교하면 당연히 군 문화가 개선되고 좋은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아직도 부족하다. 군대 내 가혹 행위나 악습 등을 아예 뿌리 뽑는 것은 사실 불가능하다. 대한민국이 스탠리 큐브릭 감독의 <풀 메탈 자켓>(1987)처럼 노골적으로 인간- 병기화를 추구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남자라면 누구나 지는 국방의 의무가 현실에서 ‘남자- 되기’의 통과의례처럼 간주되어온 관습에 의문을 제기할 필요가 있다. 국방의 의무를 수행하면서 무의미하게 벌어진 폭력과 지워지지 않은 상처를 그럴싸한 이데올로기로 덮은 것은 아닌가 질문해야 한다. 남자-되기나 군대 다녀오면 인간 된다는 식의 사회화 모토는 정작 군 생활과 관련이 없다. ‘참을 수 없으면 즐기라’는 교훈은 슬기로운 군 생활을 위한 모토가 아니라, 부조리한 현실에 맞서 싸우지 못하는 자신의 나약함(비겁함)에 비관하지 말고 일단 살아남으라는 충고다. 즉 잠시 삶의 의지나 의미를 잃어버리는 것을 체득하라는 권유다.
물론 군대 내 구타나 따돌림을 막기 위한 대안을 고민하고 시스템을 정비하는 것이 나름의 성과를 내놓을 수도 있다. 그럼에도 대부분은 은근슬쩍 넘어가려는 미봉책에 불과하다. 강제 의무나 징병제를 유지하는 동안에는 군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 없다. 그나마 직업군인 수를 늘리는 모병제가 현재로서는 최선의 방법일 수 있다. 끝장토론이나 청와대 국민청원 등으로 답을 찾을 수 없는 혹독한 과제다. 차라리 대한민국의 최고 권력자가 되고 싶어 하는 대선 후보에게 군 문제 해결을 위한 실천 방안을 직접 들을 필요가 있다. 대통령이 되고자 한다면 당연히 국방의 의무와 폭력적인 군 문화를 어떻게 개선할지 묘책을 내놓을 의무가 있다. 우리는 군 문제의 해결책을 제시하라고 요구해야 한다.
궁극적으로 군 문화를 바꾸는 것은 단순히 군대만의 개혁으로 가능한 것이 아니다. 보다 솔직해지자. <D.P.>는 <미생>의 또 다른 얼굴일 뿐이다. 학교-군대-직장으로 이어지는 사회에서 청춘들은 권력자의 횡포를 비롯해 무책임하고 폭력적인 언행에 수없이 노출된다. 직장에서 완생을 꿈꾸는 직장인들은 미생으로 짓밟히기 일쑤다. 인턴을 포함해 상당수 직장인들은 회사나 상사가 쓰고 버리는 일회용 소모품 신세다. 학교- 군대-직장의 권력 구조와 폭력적인 문화 속에서 우리는 한없이 작아진다. 권력의 이면에는 인간의 영혼을 파괴하는 폭력이 도사리고 있기 마련이다. 공정과 정의가 오늘날의 시대정신인 대한민국에서 여전히 필요한 것은 인권이다. 모두가 평등하다는 가장 기본적인 권리를 가슴에 품고 인식의 변화를 시작해야 한다. 흔하디흔한 주장이 맞다. 인정한다. 하지만 스스로 우리 사회를 바꾸지 않는다면 어떤 것도 이룰 수 없다. 단순한 팬심이 아니라 사회 변화를 위한 호소로서 <D.P.> 시즌 2를 기꺼이 요구해야 한다. 학교, 군대, 직장을 포함한 우리 사회 전체를 새롭게 상상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2014년 하나 되어 “우리 모두가 미생”이라고 외쳤던 것처럼, 함께 선언하는 일부터 시작해야 한다. “나는 D.P.다.” “우리 모두가 D.P.다!”
EDITOR : 정소진 | WORDS : 전종혁(영화 칼럼니스트)
Copyright © 아레나.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