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진실과 '개소리의 시대'
[세상읽기]
[세상읽기] 김만권ㅣ경희대 학술연구교수·정치철학자
“우리 문화에서 가장 눈에 띄는 특징 가운데 하나는 개소리(bullshit)가 너무도 만연하다는 사실이다. 모든 이가 이것을 알고 있다. … 그런데 우리는 이런 상황을 당연하게 여기는 경향이 있다.” 프린스턴 대학교에서 도덕철학을 가르쳤던 해리 G. 프랭크퍼트가 쓴 (2005)의 첫 문단에 나오는 말이다. 우리말로는 <개소리에 대하여>란 제목으로 출간됐다. 우리말로 옮긴 이는, 이 책이 <뉴욕 타임스> 베스트셀러 목록에 올랐을 때 ‘On Bull____’으로 표기된 것에 힌트를 얻어 지면에 쓰기엔 적당하지 않은 비속어일 수도 있는 ‘개소리’로 옮겼다고 밝혔다.
그렇다면 프랭크퍼트는 왜 흔히 쓰는 ‘거짓말’(lie)이란 표현을 두고 굳이 ‘싸지른다’는 뜻을 은연중에 내포한 ‘불싯’이라 했을까? 그 결정적 차이는 진리값에 대한 관심이다. 그가 지적하듯 거짓말은 최소한 진리의 포장을 입고 있다. 남을 진정으로 속이려 하는 자들은 치밀하게 말들을 짜 맞춘다. 그래서 거짓말은 때로 진실보다 더 진실처럼 보인다. 거짓말엔 적어도 상당한 노력이 들어간다. 그 노력이 가상하기라도 한 것이다. 이를 두고 프랭크퍼트는 거짓말쟁이는 진리에 대한 최소한의 존중이라도 있다고 본다.
반면 개소리쟁이는 그렇지 않다. 그들은 자신의 입에서 나오는 것들이 진리이든 거짓이든 상관하지 않는다. 그렇기에 개소리쟁이는 거짓말쟁이보다 훨씬 더 자유롭다. 진리에 얽매이는 거짓말쟁이들은 적어도 진실의 맥락을 따르는 척이라도 하는 데 반해, 개소리쟁이는 사실의 맥락을 무시하고 때로는 필요한 맥락을 자유자재로 위조해낸다. 그래서 개소리쟁이들은 창의적이기까지 하다. 임기응변, 꾸며냄, 창의적 연기의 여지를 가지고 “사태의 진상이 실제로 어떠한지와는 무관”하게 말한다. 프랭크퍼트는 개소리의 독특한 특징이 허위냐 사실이냐에 있는 게 아니라, 실제와는 무관하게 “자신의 속셈을 부정확하게 진술”하는 데 있다고 강조한다. 이런 사실에 대한 무관심으로 인해 개소리는 금세 들통이 나지만 개소리의 목적 자체가 사실과 무관한 “부정확한 진술”이기에 개소리쟁이들은 이를 상관하지 않는다.
흔히 우리 시대를 ‘탈진실의 시대’라고 한다. 그런데 거짓말은 과거에도 있었다. 특히 정치는 과거로부터 권력자들의 거짓이 때때로 난무하는 영역이었다. 인류는 오래전부터 권력과 거짓말의 관계에 대해 잘 파악하고 있었고, (한나 아렌트가 정확히 설명하고 있듯) 이런 정치에서 거짓에 맞서 사실을 지켜내기 위해 언론에 이를 보호하는 임무를 주고, 대학에는 진리를 수호하는 최후 보루 역할을 맡겼다. 여기에 더해 민주정체는 권력에 투명성의 의무를 부여하여 이 세계가 사실의 기반 위에 작동할 수 있도록 최선의 노력을 해왔다.
이처럼 거짓말은 늘 있었고, 인류는 그 거짓에 맞서 싸워왔다. 그런데 왜 굳이 우리 시대가 ‘탈진실’의 시대, 거짓말에 맞서 싸워온 인류의 노력이 패배한 것처럼 보이는 상황에 이른 것일까? 혹 그 이유가 ‘거짓말’과 ‘개소리’의 차이에 있는 것은 아닐까? 과거의 권력자들과 청중은 공적인 말들이 표면적으로라도 진실의 포장을 입고 있길 원했다면, 우리 시대의 권력자들과 청중은 이제 그것이 진실과 무관한 개소리일지라도 자기 이익에 부합한다면 이를 기꺼이 내뱉고 수용하고 있기 때문은 아닐까? 그렇다면 탈진실 시대의 본질은 ‘거짓말의 시대’가 아니라 ‘개소리의 시대’일 것이다. 이렇게 보면 사실을 수호하는 임무를 부여받은 언론이 탈진실 시대에 맞닥뜨린 고난은 ‘거짓말’에 대항해 사실을 지켜내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개소리’의 난무에 이를 걸러내는 일조차 버거운 데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또 다른 문제는 프랭크퍼트가 지적하는, ‘말’이 ‘똥’이 되는 ‘개소리의 만연’이 진실의 최후 보루인 대학에까지 이른 듯하다는 데 있다. 잘 알려져 있듯 국민대 연구윤리위원회는 최근에 불거진 논문검증 문제와 관련해 ‘국민의 눈높이는 이해하지만 검증시효가 만료되어 이 규칙을 지키겠다’고 공표했다. 그런데 논문검증시효는 2011년 교육부가 이미 폐기한 사항이다. 윤리위가 이를 몰랐을까? 이 기만은 이내 들통났다. 이에 학문하는 자로서 참담함을 느끼는 건, 학문하는 기관의 변명이 소위 진실의 포장을 입고 있는 ‘거짓말’에도 미치지 못한다는 생각을 도저히 떨칠 수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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