탄소 줄이려다 '그린플레이션' 불질렀다
지난달 30일 유럽의 천연가스 가격은 전날보다 12.8% 오르며 사상 최고치인 메가와트시(MWh)당 97.73유로까지 치솟았다. 연초보다 무려 400% 폭등한 것이다. 유럽 각국은 2015년 파리협정 이후 석탄 발전소를 무더기 폐쇄하고 풍력발전소를 대거 늘렸다. 그런데 최근 바람 약화로 풍력 발전량이 급감하자 화석연료인 천연가스값이 치솟으며 한겨울 전력난 공포까지 커지고 있다.
탄소중립 시대에 ‘악당’으로 전락한 석탄 가격도 폭등세다. 글로벌 기준이 되는 호주산 유연탄은 올 초 100달러대에서 현재 400달러 수준으로 급등했다. 석탄값 급등은 최근 중국이 직면한 사상 최악 전력 대란의 한 원인이 됐다. 원가 압박이 커진 현지 발전업체들이 잇따라 가동을 중단한 것이다.
전 세계가 탈탄소·친환경 가속페달을 밟고 있는데, 화석 에너지 가격이 오히려 폭등하는 역설이 벌어지고 있다. 풍력·태양광 발전량이 에너지 수요를 못 쫓아가면서 채굴 감소로 품귀 상태인 화석연료 가격이 급등하고 있는 것이다. 이른바 ‘그린플레이션(greenflation)의 습격’이다. 친환경을 뜻하는 그린과 인플레이션의 합성어인 그린플레이션은 탄소중립으로 가는 과정에서 에너지와 원자재 가격이 오르며 물가를 압박하는 현상을 말한다. 영국 파이낸셜타임스(FT)는 “최근의 화석 에너지 가격 급등은 그린플레이션의 충격파가 경제를 위협할 수 있다는 경종을 울린 것”이라고 진단했다.
◇탄소중립의 역설… 그린플레이션
천연가스는 글로벌 시장에서 무차별 폭등하고 있다. 올 들어 400%가량 급등한 유럽은 물론 미국 헨리허브 가격도 올 초 MMBtu(열량 단위)당 2.6달러에서 9월 말 5.9달러로 배(倍) 이상 올랐다. 우리나라와 일본에서 쓰는 JKM 가격 또한 지난 한 달 사이 MMBtu당 18달러에서 31달러로 급등했다.
세계 각국이 석탄 채굴을 줄이고, 석유·가스 부문 투자를 늦추면서 에너지 분야 수급 불균형도 악화되고 있다. 지난해 전 세계에서 석유 채굴에 투자한 금액은 3290억달러(385조5000억원)로 8070억달러(954조원)를 기록한 2014년의 절반에도 못 미쳤다. 박주헌 동덕여대 교수(경제학)는 “코로나 이전인 2019년과 비교해 올해 늘어난 전세계 전력 수요의 60%는 태양광과 풍력이 공급했지만 나머지 40%는 여전히 석탄과 석유, 천연가스 같은 화석연료가 채웠다”고 말했다.
재생에너지 발전과 전기차에 필수적인 원자재 가격들도 급등세다. 배터리와 태양광 패널, 풍력발전용 타워에 고루 쓰이는 알루미늄은 올 초 t당 2000달러에서 지난달 말 2851달러까지 치솟았다. 배터리용 수산화리튬은 9월 말 가격이 연초 대비 3배 수준인 t당 15만4500위안까지 급등했다. 신재생 발전에서 수요가 5배 이상 증가하는 구리도 지난 5월 전년 대비 두 배 수준인 t당 1만달러까지 치솟았다. 특히 알루미늄은 최대 생산지인 중국이 탄소중립을 위해 제련 공장 가동을 줄이면서 가격 상승을 부채질했고, 구리도 전 세계 생산의 40% 이상을 차지하는 칠레와 페루에서 환경 규제를 강화하면서 채굴이 위축됐다.
◇속도 조절 필요하다는 지적 제기
그린플레이션이 악화되면서 글로벌 인플레이션 우려도 커지고 있다. 로이터통신은 최근 “에너지와 각종 원자재 등 원료 가격이 오르면서 반도체 가격 인상이 가시화되고 있다”며 “반도체 가격 인상은 휴대폰부터 자동차까지 연쇄적으로 인플레이션을 일으킬 것”이라고 보도했다. 박주헌 교수는 “그간 태양광 발전이 경쟁력을 갖게 된 이유 중 하나는 중국의 저렴한 전기요금이었다”며 “탄소중립 정책이 촉발한 에너지 가격 상승이 역설적으로 태양광 등 신재생 산업에 타격을 줄 가능성도 있다”고 말했다. 손양훈 인천대 교수(경제학)는 “깨끗하면서도, 안전하고, 값도 싼 에너지는 없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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