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선]시월이다
[경향신문]
어느덧 시월이다. 자갈밭 마당에 햇빛이 들어오면 한창 꽃을 피우던 채송화는 이제 꽃을 피우지 않는다. 찾아오는 손님들이 키 작은 채송화 앞에 쪼그려 앉아 사진을 찍고는 하였는데, 이젠 다음해 여름까지 기다려야만 그 모습을 볼 수 있을 것이다. 장독대 옆에 핀 붉은색 흰색 보라색 봉숭아는 손만 대면 깍지가 톡 터져서 씨앗이 튀어나온다. 처마 아래 해 질 무렵이면 꽃을 피우던 분꽃은 더 이상 키를 키우지 않고 찬 바람 맞을 채비를 하고 있다. 마당 들머리 우체통 옆에 사람 키보다 훨씬 크게 자란 해바라기는 산밭에서 일하고 돌아오는 아내와 나를 보고 고개 숙여 안부를 묻는다. “가을걷이 때라 몸과 마음이 바쁘고 고달프겠어요? 참, 다랑논 언덕에 쑥부쟁이는 지난해처럼 곱게 피었던가요?” “아아, 이제야 여기저기 꽃을 피우고 있어요. 어찌나 꽃이 곱던지 마늘을 심다가 일손을 놓고 한참 보고 왔어요.” 이렇게 살아 있는 것은 살아 있는 것끼리 하루하루 안부를 묻는다.
몹쓸 코로나19가 산골 마을까지 찾아와서 평범한 일상을 무너뜨리고 있지만, 지난해 그 자리, 변함없이 꽃은 피고 지고 다시 피고 진다. 이젠 지긋지긋한 가을장마도 그쳤다. 우리 집 작은 마당에는 어느새 가을로 가득 차 있다. 날마다 따서 말리는 녹두는 어찌나 빛깔이 좋은지 눈이 부시다. 토란줄기는 낫으로 베어 이삼일 그늘에 두었다가 알맞은 크기로 툭툭 자르고 껍질을 벗겨 다시 먹기 좋은 크기로 잘라 말리고 있다. 두어 달 내내 틈만 나면 따서 말리던 여주는 이젠 끝물이라 작은 녀석도 다 따서 말린다. 얼른 따지 않으면 노랗게 익어 버려 먹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17년 동안 농사지으면서 올해만큼 고추농사가 잘된 해는 없다. 1000평 넘는 산밭에 수십 가지 작물을 심고 거두면서 농약과 화학비료와 비닐조차 쓰지 않고 농사짓는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니다. 그래서 올해는 고추밭 두둑에 종이를 덮어 농사를 지었다. 그 덕인지 모르지만 시월인 지금도 고추가 주렁주렁 달려 빨갛게 익고 있다. 어찌나 고마운지 고추밭에 갈 때마다 인사를 한다. “고추야. 고맙다야. 이렇게 빨간 빛깔로 주렁주렁 열어 주어 농협 빚도 갚을 수 있겠다야.”
오늘 낮엔 앞집에 사는 우동 아지매가 우리 집 대추나무를 보고는 “대추가 다 익었는데 얼릉 따서 말려야 먹을 수 있제. 하이고, 이것저것 농사일이 많으니 대추 딸 시간도 없제.” 그 말씀을 듣고 김장배추밭에서 배추벌레를 잡다가 얼른 일어나 대추를 땄다. 팔월 하순에 씨앗을 심은 가을무는 어느새 잎이 자라 땅속에 손가락만 한 무도 달렸다. 솎은 무 이파리는 마을 사람들 나누어 주고 우리도 김치를 한 통 담가 두었다. 오늘은 어떤 일이 있어도 녹두를 다 베고 말려야 한다. 그 밭에 거름을 넣고 미리 갈아두어야 한다. 그래야만 시월 하순에 양파 모종을 심을 수 있으니까.
시월 산밭엔 쪽파, 대파, 마늘, 녹두, 콩, 수수, 강황, 여주, 생강, 들깨, 늦옥수수(시월에 따서 먹는 옥수수), 당근, 비트, 감자(내년에 씨감자 하려고 심은 감자), 호박, 배추, 무, 케일, 상추, 부추, 시금치, 쑥갓 들이 쑥쑥 자라고 있다. 심는 시기와 거두는 시기가 저마다 다른 농작물이 산밭을 가득 채우고 있다. 농작물이 자라면 농부도 자라고, 농작물이 여물어 가면 농부도 여물어 간다.
서정홍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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