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영미의 어떤 시] [39] 어느 날 어느 때

최영미 시인·이미출판 대표 2021. 10. 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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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 하늘이 푸르고 아름답다는

그저 그것만으로

어쩐지 좋은 일이 있을 것만 같은

그런 때는 없는가

하늘 높이 솟아올랐다

허무하게 땅에 떨어지는 분수도

쓸쓸하게 가지를

떠나는 낙엽 한 잎마저

어쩐지 기쁨에 겨워

춤추는 양 보이는

그런 때가

-구로다 사부로(黑田三郞·1919∼1980)

(유정 옮김)

/일러스트=박상훈

그런 때가 내게도 있었다. 노랗게 물든 은행잎을 보는 것만으로 기분이 좋아지고, 푸른 하늘에 떠가는 구름 한 점을 온 마음 다 바쳐 사랑하던 때가 내게도 있었다. 하늘을 쳐다보며 걷다 돌부리에 걸려 넘어진 적이 있었다. 분수처럼 솟아올랐다 허무하게 땅에 떨어지는 인생. 어차피 떨어질 바에야 하늘 높이 올라가 보는 것도 좋겠다.

구로다 사부로는 히로시마에서 태어났는데 전후 세대 일본 시인들의 강박―원자폭탄과 패전국의 아픔을 노래해야 한다는 고정관념에서 자유로운 희한한 시인이다. “어느 날 어느 때” “가을날 오후 3시” “해 질 녘 삼십 분”처럼 일상의 어느 순간을 포착해 시의 그물을 짜는 능력이 탁월하다. 읽는 즉시 머리에 박히는 개인적인 목소리. 하늘과 분수와 낙엽을 노래한 서정시에 원자폭탄이 등장하지는 않지만, 어느 날 어느 때 어른거리는 우수는 시대의 어둠일 것이다. 허무하고 쓸쓸한 낙엽 한 잎이, 한낱 개인이 감당해야 했던 시대의 우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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