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유식의 온차이나] G2 대국의 탈레반식 인질 외교
중국 내 외국 기업인 "언제 길거리에서 잡혀갈 지 모른다" 불안
화웨이 창업자 런정페이의 딸이자 이 회사 재무책임자인 멍완저우(孟晩舟·49) 부회장이 9월24일 석방됐습니다. 2018년 12월1일 남미행 비행기로 갈아타기 위해 밴쿠버 공항에 들렀다가 미국 요청으로 캐나다 경찰에 체포된 지 3년 만이죠.
멍 부회장은 미국산 컴퓨터·통신 장비 등을 이란에 판매하고 거래은행인 HSBC 은행을 속이는 등 UN과 미국의 대이란제재를 위반한 혐의를 받았습니다. 미 법무부가 미국 재판정에 세우기 위해 캐나다에 범인 인도 요청을 하고, 멍 부회장이 소송으로 대응하면서 3년 가까이 캐나다 자택에 구금돼 있었죠.
◇개선장군식 귀환 vs 눈물의 상봉
중국은 멍 부회장 귀국을 화려한 정치 이벤트로 꾸몄습니다. 에어 차이나 전세기를 보내 선전으로 데려오고 그 장면을 생중계했죠.
멍 부회장은 중국을 상징하는 붉은색 드레스로 갈아입고 개선장군처럼 트랩을 내려온 뒤 “중국 공민 한 사람 한 사람의 안위를 걱정하고 보살펴주신 시진핑 주석에 감동했다”고 했습니다. 관영 매체들은 미국을 압박해 중국 공민을 조국의 품으로 다시 데려온 ‘위대한 외교적 승리’라고 자축했죠.
하지만 멍 부회장을 데려오기 위해 지난 3년간 무고한 캐나다인 2명을 인질로 잡고 있다가 풀어준 점은 언급하지 않았습니다. 이들은 멍 부회장을 태운 에어 차이나 여객기가 이륙한 직후에야 석방 사실을 통보받았다고 해요.
멍 부회장이 석방 협상 과정에서 미국 측 공소 사실을 모두 인정한 점도 일절 거론하지 않았습니다.
◇멍완저우, 미국 측 공소 사실 시인
멍 부회장 체포는 미국 내에서도 무리한 법 집행이라는 지적이 있었어요. 화웨이의 대이란 제재 위반이 사실이라 해도 기업을 제재할 일이지, 개인까지 형사적으로 처벌하는 건 과도하다는 것입니다. 중국과 무역 전쟁을 치르고 있던 트럼프 행정부가 멍 부회장 신병을 협상 카드로 활용하려 한 것 아니냐는 분석도 있었죠.
부담이 커진 건 캐나다였습니다. 중국에서 활동하던 전직 외교관 마이클 코브릭과 대북사업가 마이클 스페이버가 멍 부회장이 체포된 지 10일 만에 중국 당국에 붙잡혔죠. 미국에 이어 2위 무역 상대국인 중국으로부터 경제 보복도 당했습니다.
미중은 바이든 행정부가 출범한 올해 초부터 투 트랙으로 협상을 했어요. 미국 검찰과 멍 부회장 변호인단이 협상을 하는 것과 함께 외교 당국 간 채널로도 협의가 진행됐습니다.
월스트리트저널에 따르면 미국은 멍 부회장이 미국 측 공소 사실을 인정하면 멍 부회장 개인과 화웨이라는 회사를 분리해 사건을 처리하겠다는 입장을 제시했다고 합니다. 자백하면 풀어주겠다는 뜻이죠. 대신 구금 중인 캐나다인 2명을 석방할 것을 요구했습니다.
멍 부회장이 사실을 시인하는 쪽으로 선회하면서 양측은 기소유예합의(DPA)에 이를 수 있었습니다. 내년 12월1일까지 합의한 규칙을 지키면 기소하지 않기로 한 거죠.
정부 차원에서는 지난 7월 웬디 셔먼 국무부 부장관이 중국을 방문해 셰펑 중국 외교부 부부장과 회담하면서 이 문제를 집중적으로 논의했고, 9월초 바이든 대통령과 시진핑 주석 간 통화 때 최종 합의를 봤습니다.
◇3년 외교 게임의 승자는?
멍 부회장 석방 이후, 서방과 중국에서는 3년간 계속된 두 강대국 간 외교 게임에서 누가 승리했느냐를 두고 후일담이 한창입니다.
미국은 멍 부회장을 석방했지만, 제재 위반 사실에 대한 자백을 받아낸 만큼 앞으로 화웨이를 제재할 근거를 확보했죠. 석방 대가로 기후 변화 문제 등에 있어서 중국의 협조도 약속받았다고 합니다. 미중 사이에서 시달려온 캐나다의 짐을 덜어줬다는 점에서 동맹 외교에도 도움이 될 겁니다.
중국 역시 해외에 구금된 자국 국민을 구해낸 건 성과라고 할 수 있겠죠. 하지만 중국 내 외국 국민을 간첩 활동을 이유로 붙잡아 3년간 감옥에 넣어놓고 탈레반식 인질교환극을 벌였다는 점은 두고두고 부담이 될 겁니다.
프랑스, 영국, 독일 언론은 G2의 일원이라는 중국이 이런 식의 인질 외교를 벌인 데 대해 분노하고 있어요. 중국은 아버지가 경제 범죄에 연루됐다는 이유로 중국계 미국인 신시아 류(30)와 빅터 류(22) 등 2명의 귀국도 3년이나 금지했다가 이번에 풀어줬다고 합니다.
중국에서 활동하는 외국 기업인들은 “누가 언제 길거리에서 잡혀갈 줄 모른다”며 불안해 한다고 해요. 중국엔 우리나라 기업인도 적잖죠. 일부에서는 앞으로 미중 갈등이 좀 완화되지 않겠느냐고 하는데, 제 생각엔 이번 일로 중국 체제에 대한 서방의 불신이 더욱 깊어질 것으로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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