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적]손바닥 속 '王'자
[경향신문]
2001년 7월이었다. “개띠 정치인이 누구 있지?” “왜요?” 고위 당직을 지낸 동교동계 의원은 “용한 사람이라고 해 가보니 ‘내년 대선 해엔 개띠가 좋다’ 한다”며 이인제(쥐띠), 한화갑·김중권(토끼띠), 이회창·김근태(돼지띠)도 다 아니라고 했다. 전화를 끊고 찾아보니 두 사람이 있었다. “노무현이 개띠던데요. 이한동도.” “에이 설마.” 마음속에 ‘이인제 대세론’을 품고 있던 그로서는 뜻밖이었을 것이다. 노 전 대통령은 2002년 신년 여론조사에서도 지지율이 1~2% 나왔으니, 2001년 여름의 노(老)정객의 머릿속에 그가 있을 턱이 없었다.
1997년 대선 직전엔 시청률 1위를 달리던 KBS 사극 <용의 눈물>이 소환됐다. 드라마 속 하륜이 백마 탄 이방원(태종)에게 “천기를 보니 틀림없이 왕세자가 되십니다”라고 했는데, 말 앞다리에 ‘DJ’라는 글짜가 찍혀있었다. DJ는 말을 소유한 목장을 표기한 것이었지만, 김대중 후보의 이니셜과 겹쳤다. 사극의 대부로 불린 고 김재형PD도 “살면서 가장 곤혹스러웠다”고 술회한 바 있다. 대선에서 역술가·스님이나 사주·관상·명당·이름풀이가 등장할 때 곧잘 거론되는 일화다.
국민의힘 윤석열 후보 손바닥에 적힌 ‘王(왕)’자가 입방아에 올랐다. 지난 1일 5차 TV토론에서 화면에 잡힌 왕자는 3·4차 토론 때도 있었으나, 크기가 더 커졌다고 한다. 윤 후보 측은 “같은 아파트 사는 지지자들이 토론 잘하라고 응원하며 적어준 것”이라고 했다. 지우거나 가리지 않은 것으로 볼 때, 시청자들이 후보들의 표정·동작 하나까지 주목하는 TV토론에서 일부러 노출했다고 봐도 무방하다. 바로 당내에서부터 “주술 대선이냐”(홍준표), “오방색 타령하던 최순실 같은 사람”(유승민)이란 역공이 나왔다.
대선 주자들은 십중팔구 ‘대운(大運)’이 있다고 알리고 싶어 한다. 이재명 경기지사도 SBS 예능 <집사부일체>에서 “어렸을 때 어머니로부터 ‘점쟁이가 네가 분명히 대성한다더라’는 말을 들었다”고 넌지시 전한 식이다. 뭐라도 좋은 기운을 대선에 연관시키고 싶은 것일 게다. 그래도 손바닥의 ‘왕’자는 노골적이고 선을 넘었다. 대통령은 왕이 아니고, 왕의 사고나 언행도 헌법으로 움직이는 민주사회엔 맞지 않다.
이기수 논설위원 kslee@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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