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한민의 탈인간] 성장의 카르텔
[김한민의 탈인간]
김한민ㅣ작가·시셰퍼드 활동가
하나의 커다란 서사가 전국을 휩쓰는 일이 이 나라에서 드물진 않지만, 최근 특히 잦은 폭풍이 있다. 부동산, 개발, 집값, 폭리…. 이 단어들 없이 동시대 한국의 시대정신 혹은 “시대-정신없음”을 설명할 수 있을까. 터지는 이슈마다 디테일은 달라도 양상은 비슷하다. 부동산 개발 사업, 정보·연줄을 이용해 폭리를 취한 자들, 분노하는 여론, 몇몇 피라미만 처벌하고 흐지부지되는 수사…. 교훈 하나는 확실히 남겼다. 세상에서 가장 깨기 어려운 게 이권 카르텔이란 것.
카르텔은 담합하는 동종 업계를 뜻하지만 ‘이해관계로 얽힌 배타적 성향의 파벌’이란 의미로 느슨하게 쓰겠다. 실제로 법의 경계를 넘나들며 수단과 방법을 안 가리고 밥그릇을 챙기는 집단이 횡행하니 무리한 개념 확장은 아니다. 이렇게 보면 온 세상이 카르텔 천지 같다. 범죄자·재벌·정치인 카르텔에서부터 토건 카르텔, 엘리트들의 스펙 품앗이 카르텔, 공무원 카르텔까지…. 이들이 공동체의 미래를 위협하고 불평등을 심화시키는 건 물론이다. 이 중에서도 가장 깨기 힘들고 큰 것이 바로 성장과 개발의 카르텔이다. 너무도 흔하고 너무도 많은 이들이 속해 있어 딱히 카르텔이라 의식하지도, 그렇게 부르지도 않는 카르텔. 이들의 정체는 뭘까? 오로지 (양적) 경제 성장만이 답이고 대안은 고려할 가치가 없다고 생각하며, 전체 파이가 커지면 온다는 낙수효과의 ‘복음’을 믿고, 경제 성장을 저해하는 모든 것을 제거할 장애물로 여기며, 인류를 위협하는 기후위기의 원인이 성장에 기반한 고도 산업 사회라는 사실이 입증돼도 끝내 성장 강박을 못 버려 “녹색 성장”이라도 해야 성이 차는 무리다. 탈성장 담론 따윈 거들떠보지도 않다가도, 누군가 진지하게 얘길 꺼내면 반드시 한수 가르치려 달려드는 이들은, 개발의 건수가 생기면 좌우 할 것 없이 똘똘 뭉쳐 순식간에 한 팀을 이룬다. ‘개발판’ 가까이 붙으면 떡고물이 떨어질 것을 확신하기에. 한국토지주택공사(LH) 투기 사태, 화천대유 사건 등을 욕하긴 쉽지만, 비슷한 기회가 주어질 때 혹하지 않을 한국인은 생각보다 적다. 말로만 전지구적 환경 파괴에 분노하고 자본주의의 폐해를 비판하지, 사생활에선 개발이 되고 땅·집값 오르길 갈망하는 성장주의자. 이것이 우리 대부분의 모순적 초상이다.
이 카르텔을 깰 방법은 뭘까? 우두머리를 제거해봤자 또 다른 머리가 생겨나고, 워낙 견고하게 짜인 방어논리 때문에 쉽지 않다. 내부 균열과 이탈자들에게 기댈 수밖에 없는데, 그러려면 철석같이 신봉해온 카르텔의 장밋빛 약속이 허구임을 깨닫게 해줘야 한다. 지난 수십년간 낙수효과는 미미했다. 불평등과 빈곤은 심화됐다. 생태계는 돌이키기 힘들 만큼 파괴됐다. 매년 3%씩만 성장해도, 글로벌 경제는 24년마다 두배씩 커져 세기말엔 10배가 된다. 그걸 감당할 지구는 없다. 굳이 만들려면 차라리 “탈성장의 카르텔”을 결성하는 편이 미래세대에 이익이다. 11월의 유엔 기후정상회의를 앞두고 전세계적으로 그린뉴딜에 상응하는 거대한 전환이 불가피하다는 공감대는 형성되었다. 하지만 기후변화를 정말로 막기 위해서는 총 에너지 사용량 감소와 “경제성장 없는 그린뉴딜”이 불가피하다는 사실(자세한 내용은 최근 번역된 저서 <디그로쓰>를 추천함)까지 받아들인 사람들은, 주로 회의장 바깥에 있는 당신과 나 같은 시민들이다. 그래서 더 크게 외쳐야 한다. 지금 당장 필요한 건 녹색 성장이 아닌 탈성장! 성장을 넘어 성숙으로! 사실 탈성장은 어려운 개념도 아니다. 현재의 경제적 역량을 좀 더 필수적인 식량·주거·교통·교육·의료에 집중하는 건 성장 없이도 가능하다. 그러나 지금 같은 척박한 토양에서는 엄청나게 담대한 상상처럼 들린다. 이것이 상상력을 치명적으로 고갈시키는 부동산과 개발 얘기의 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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