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디스 버틀러는 말했다 "트랜스 혐오 페미니즘, 받아들일 수 없다"

임재우 2021. 10. 3. 17: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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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S 강연 전후 소동 벌어진 '주디스 버틀러 강의'
강연서 "젠더 이론은 남성 우월주의에 도전,
가족제도 파괴 아니라 다른 형태도 가치있다는 것"
<교육방송(EBS)>의 ‘위대한 수업, 그레이트 마인즈’에서 강연에 나선 주디스 버틀러 미국 버클리대 교수. 강연 화면 갈무리
“젠더라는 용어엔 엄청난 힘이 있죠. 어떻게 살지, 어떤 걸 받아들일지, 무엇을 괴물로 혹은 정상으로 볼지 결정합니다. 이게 바로 젠더 용어의 안과 밖에 미치는 우리의 힘을 알아야 하는 이유입니다.”
<젠더 트러블>의 저자이자 세계적인 젠더 이론가인 주디스 버틀러 미국 버클리대 교수의 말대로 ‘젠더’라는 말의 힘은 셌다. <교육방송>(EBS)이 지난 21일부터 25일까지 다섯 차례에 걸쳐 방영한 ‘위대한 수업, 그레이트 마인즈’의 주디스 버틀러 편은 방영 전후로 한국 사회에서도 적잖은 논쟁과 소동을 불렀다.
방영 전부터 보수적인 기독교 단체와 매체들은 버틀러가 자신의 책에서 ‘소아성애’와 ‘근친상간’을 옹호했다며 방송 중단을 요구했다. 교육방송은 이것이 ‘근거 없는 비판이라는 게 확인됐다’며 방송을 예정대로 내보냈다. 한 편에서는 에스엔에스(SNS) 상의 일부 래디컬 페미니스트들이 버틀러가 트랜스젠더의 인권을 여성보다 앞세운다며 비판의 목소리를 쏟아냈다. 일부 누리꾼들은 버틀러의 ‘쇼트커트’를 보고 오해해 ‘백인 남성이 설파하는 페미니즘은 듣지 않겠다’는 글을 올리기도 했다. 버틀러의 지정 성별은 여성이고, 자신을 논바이너리 레즈비언으로 정체화하고 있다.
이러한 소동 속에 정작 60여분 분량의 방송에서 버틀러가 한국의 시청자를 향해 어떤 메시지를 내놨는지는 잘 알려지지 않았다. 버틀러는 강연 속에서 마치 이러한 반발을 예상한 것처럼 이에 반박하는 취지의 주장을 여럿 폈다. 보수적 기독교 매체를 통해 주장되거나 에스엔에스상에서 설파되는 버틀러에 대한 대표적인 공격 세 가지를 골라, 버틀러가 강연에서 이에 대해 어떠한 ‘응답’을 내놨는지 살펴봤다.

1. “인간의 성은 본질적으로 그리고 객관적인 과학적인 사실에 근거해 남성과 여성으로 분류되어 있고, 이 성별은 고정된 질서로 바뀔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버틀러는 강의 첫머리에서 프랑스의 작가이자 철학자인 시몬 드 보부아르의 유명한 말을 인용한다. “여자는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지는 것이다.” 버틀러는 ‘여자가 만들어지는 것’이라는 선언이 생물학적 성별과 젠더를 구분하는 이론적 토대가 되었다고 설명한다. 이 선언 이후 생물학적 성별과 별개로 “특정 시대와 장소에서 성별에 부여된 사회적 의미”를 뜻하는 개념인 ‘젠더’를 구분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나아가 버틀러는 선천적으로 주어지는 ‘생물학적 성별’이라는 개념도 고정되고 완성된 개념이 아니라 의학과 과학의 발전에 따라 변화하는 것이라고 지적한다. 예컨대 버틀러는 초창기 의학은 오직 남성에게만 성별을 부여했다는 점(한 가지 성 모델)을 짚는다. 당시에는 “남성들의 성기가 유일한 성별 판단의 기준이었고, 여성은 음경이 없으므로 결핍된 존재”였다는 것이다. 자명해 보이는 생물학적 성별 구분조차 특정 시대의 인식 틀 안에서 규정된다는 지적이다.

또한 버틀러는 ‘간성(intersex·신체적 특징이 이분법적 성별 구분에 들어맞지 않는 사람)’의 존재 역시 ‘남성과 여성’이라는 생물학적 이분법이 모든 인간을 포괄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준다고 설명한다. “성별 구분에 관한 한 모든 인간을 포괄하는 보편타당한 주장은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이 버틀러의 주장이다.

<교육방송(EBS)>의 ‘위대한 수업, 그레이트 마인즈’에서 강연에 나선 주디스 버틀러 미국 버클리대 교수. 강연 화면 갈무리

2. “젠더개념을 인간의 성별에 적용하는 경우에 … 남자와 여자로 구성되어 있는 인류 보편의 성 질서를 해체하고, … 결혼질서를 해체시키게 된다.”

버틀러는 강의에서 젠더 개념을 받아들이면 “가족제도가 붕괴하고, 인구가 감소하고, 국가와 문명까지 멸망할 것”이라는 주장에 대해서도 반박한다. 버틀러는 페미니스트가 결혼과 가족제도를 택하는 이들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 바깥에도 여러 선택지가 존재한다는 걸 일깨운다고 말한다. “비록 이성 간의 연애와 결혼하는 것이 우세한 사회형태라 하더라도 유일한 선택지가 아니고, 어떤 선택을 하든 모든 결혼형태는 똑같은 가치를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버틀러는 남성과 여성이라는 이분법적 사고방식을 가진 사람들, 이러한 젠더 범주 안에서 안정감을 느끼는 이들의 주장을 “윤리적으로 생각했을 때 조건 없이 존중받아야 한다”고 말한다. 동시에 트랜스젠더와 같이 이러한 이분법에서 살 수 없고 그들만의 젠더 용어가 필요한 사람들 역시 존중받아야 한다고 강조한다. “누군가가 자신을 정의하는 방식에 의문을 던져서는 안 되고, 자신을 표현할 자유를 존중해야 한다는 것”이 버틀러의 생각이다.

버틀러는 젠더 이론이 “남성을 파괴한 것이 아니라 남성 우월주의에 도전한 것이고, 가족제도를 파괴한 것이 아니라 다양한 종류의 가족이나 연대도 똑같이 중요한 가치를 지닌다고 주장했을 뿐이고, 남녀의 생물학적 차이를 파괴한 것이 아니라 그 차이가 과거의 주장처럼 절대적인 사실인지 질문했을 뿐”이라고 강조한다.

<교육방송(EBS)>의 ‘위대한 수업, 그레이트 마인즈’에서 강연에 나선 주디스 버틀러 미국 버클리대 교수. 강연 화면 갈무리

3. “생물학적 여성의 인권을 위한 사상인 페미니즘과 트랜스젠더의 인권은 무관하다.”

버틀러는 “트랜스젠더를 혐오하는 페미니즘은 받아들일 수 없다”며 “트랜스젠더 혐오자는 페미니스트가 아니”라고 단언한다. “페미니스트라면 ‘젠더’에 의해 누군가 차별을 받아야 한다는 생각에 반대”해야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버틀러는 ‘젠더’에 대한 공격을 페미니즘과 엘지비티큐아이(LGBTQI), 트랜스젠더 권리에 대한 공격으로 여겨야 하고, 이것이 ‘연대’의 실마리가 된다고 강조한다. 페미니스트, 성소수자 등이 모두 “공동체 안에서 공격을 받고 생존의 길을 모색”하는 상황에서 젠더를 이유로 한 모든 차별에 대한 단호한 반대가 “다양한 운동들 사이에서 우리 모두가 연대할 길을 열어주기 때문”이다.

버틀러는 강의 말미에서 젠더 이론의 핵심을 ‘다양성을 품은 자유’에서 찾는다. “우리 삶의 모습이 남들과 다르거나 남이 인정해주지 않더라도 그 자체로 가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어떻게 살아갈지, 좋은 삶이란 무엇일지 고민할 때 하나만 옳다는 생각을 버려야 합니다. 세상에 다양한 개성과 다양한 언어가 받아들여졌을 때 비로소 우리는 순조롭게 자유를 찾고 두려움을 떨칠 수 있습니다.”

임재우 기자 abbad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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