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나무처럼 고고하고 당당한 '무위자연'뛰어난 시·그림에 심다
(시사저널=김정탁 성균관대 명예교수)
백운동별서를 지은 이담로에 대해 좀 더 알아보자. 그의 아버지는 이빈(李彬)으로 45세 나이로 일찍 죽었다. 아버지 이빈의 이른 죽음이 더욱 안타까운 것은 지평이란 벼슬을 지냈기 때문이다. 지평은 정5품 벼슬이지만 사헌부 근간으로 같은 정5품인 홍문관 교리, 사간원 헌납과 더불어 중요한 청요직이다. 청요직을 지낸 사람은 당상관에 무난히 승진해 참판이나 판서에 많이 이른다. 그래서 청요직을 지낸 사람의 자부심은 대단하다. 이에 이담로도 부친의 뒤를 이어 과거급제의 꿈을 이루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을 텐데 뜻을 이루지 못해 과거에 대한 미련을 버리고 은거의 삶을 택했다고 본다.
백운동별서와 관련한 시와 그림, 양도 풍부하고 다양
그렇더라도 이것이 은거를 택한 이유의 전부는 아닐 것이다. 당시의 정치적 상황과 관련이 있지 않을까. 이담로가 별서를 짓기 시작한 시기는 1692년쯤이다. 이때를 전후해 숙종에 의해 세 차례 환국이 단행되면서 선비들이 큰 화를 입었다. 1680년의 경신환국, 1689년의 기사환국, 1694년의 갑술환국이 그것이다. 결국 갑술환국으로 남인이 쫓겨나고 서인이 다시 집권했다. 그러니 기호 지방이 아닌 변방의 선비들은 벼슬길에 올라도 뜻을 제대로 펴기 힘들었다. 이담로 집안은 영호남 선비가 대부분 그랬듯이 남인에 속했으니 더욱 그랬을 것으로 본다.
중앙 정치의 이런 변화는 이담로를 분명 실망시켰을 것이다. 실망이 그로 하여금 삶을 무위자연의 방향으로 틀게 하지 않았을까. 흥미로운 점은 그의 이런 노장(老莊)적 삶이 이름에서 이미 운명 지어졌다는 사실이다. 담로(聃老)란 이름에서 담(聃)은 '귀 클 담'이지만 노자의 이름이 담이다. 또 노(老)도 '늙을 노'지만 노자의 성이 노다. 그러니 이름에서 노자를 지시하는 의미가 중복된다. 게다가 담로를 거꾸로 읽으면 노담인데 노담(老聃)이 바로 노자이지 않은가. 그의 호도 백운동은(白雲洞隱)인데 백운(白雲)의 흰 구름이나 은(隱)의 숨어 사는 일이나 모두 노장적 삶을 따르는 게 아닌가.
백운동별서가 아무리 멋져도 그건 하드웨어일 뿐이다. 소프트웨어가 뒷받침되어야 백운동별서의 새로운 가치가 만들어진다. 그런데 별서의 소프트웨어란 다른 게 아니라 별서를 노래한 글과 그림이다. 이런 점에서 볼 때 백운동별서는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 양 측면에서 모두 최고의 가치를 지닌다. 별서와 관련해 지금까지 우리가 으뜸의 공간으로 여겨온 담양의 소쇄원도 백운동별서의 하드웨어를 따라올 수 없다. 게다가 백운동별서를 노래한 시와 그림은 다른 어떤 별서와 비교되지 못할 정도로 그 양도 풍부하고 다양하다.
이런 시와 노래 중에서 압권은 다산의 《백운동 12경》 연작시와 이 시에 따라 초의선사가 그린 그림이다. 그런데 다산의 시 못지않게 필자의 눈길을 끄는 시가 있는데 김창흡(金昌翕)·창즙(昌緝) 형제가 1678년에 나란히 남긴 《백운동 8영》이란 연작 형태의 시다. 이들 형제는 백운동별서의 경치를 소나무, 대나무, 국화, 난초, 매화, 연꽃, 거문고 연주 소리, 학 등 모두 8개로 구분해 똑같이 노래했다. 다산의 12경 구분과는 숫자도 다르고 내용도 다르지만 이들의 시에선 무위자연에 따라 살아가는 이담로의 삶이 훨씬 더 잘 묘사되고 있다.
지면 사정상 8경에 관한 시를 여기에 모두 소개할 수 없다. 그래서 정유강(소나무 언덕을 의미)의 소나무를 읊은 첫 번째 시만 소개하면서 무위자연을 살다간 이담로의 삶을 그려보고자 한다. 먼저 김창흡이 노래한 시다.
푸른 용이 거만하게 몸을 누이고
진시황의 산천을 격조 있게 비웃는군요.
그대가 거사 도연명을 우연히 만나
조용히 오간다는 소문만 들었습니다.
그대는 무위의 모임을 오래도록 지켜가면서
푸른 봉에서 소요하며 나이 들어가는군요.
이 시에서 푸른 용은 정유강의 소나무들을 지칭한다. 창흡이 볼 때 이 소나무들은 경사진 언덕에 심어져 마치 거만하게 누운 모습을 하고 있다. 소나무의 이런 모습은 진시황의 산천을 품위 있게 비웃는 듯하다. 그렇다면 푸른 용은 이담로를 의미하고, 소나무 누운 모습은 이담로가 살아가는 삶의 모습이지 않은가. 자연과 더불어 살았던 도연명과 같은 도사를 이담로가 우연히 만나 조용히 오간다는 소문만 창흡은 들었다. 그래서 창흡에게는 지금 이담로가 무위(無爲)의 삶을 사는 모임을 오래도록 지켜가며 월출산 푸른 봉 아래를 소요하면서 편안하게 나이 들어가는 것처럼 보인다. 이 시에서 김창흡은 이담로의 유유자적한 삶에 대해 부러워하는 모습을 잘 보여준다.
정유강의 소나무에 비유된 이담로의 삶
그렇다면 동생 창즙의 시는 어떠할까? 필자가 볼 때 형의 시보다 낫다. 창즙의 원래 이름은 창집이지만 큰형 창집(昌集)과 발음이 같아서 이를 구별하기 위해 '緝'을 즙이라 발음해서 창즙이라고 불린다.
가냘픈 저 소나무 연약해서 아름다워도
바위 밑 부분이 푸른 용의 근간이군요.
연약한 소나무가 세인에게 무슨 쓸모 있으랴마는
애쓰며 살아온 그대의 삶 내게는 사랑스럽습니다.
소나무는 찬바람 소리 들리는 걸 기뻐하는데
지는 햇살까지 소나무를 어루만져주니 편안하군요.
이 시에 등장하는 소나무는 표면적으로는 정유강의 소나무지만 내면적으로는 이담로를 의미한다. 그래서 소나무를 이담로로 바꿔서 해석하면 지은이의 의도를 빨리 알아차릴 수 있다. 먼저 정유강의 소나무는 연약해서 아름다워 보여도 나무줄기가 바위 뿌리까지 내릴 정도로 단단히 버티고 있다. 창즙이 볼 때 이런 소나무 모습이 이담로의 모습처럼 보인다. 또 이 소나무는 연약해 쓸모가 없어도 소나무처럼 애쓰며 살아온 이담로의 삶은 창즙에게 사랑스러워 보인다. 또 소나무는 추위가 닥쳐야 자신의 푸름을 더하기에 찬바람이 부는 겨울을 반긴다. 이와 마찬가지로 석양 햇살이 이담로를 어루만져주니 창즙은 그의 삶이 편안해 보인다. 이 시를 통해서 볼 때 창즙도 이담로의 삶을 무척 부러워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이들 형제가 아무 연고가 없었던 별서를 두고 어째서 이처럼 좋은 시를 남겼을까? 이를 이해하려면 아버지 김수항의 정치적 행보를 살필 필요가 있다. 김수항은 병자호란 때 척화신으로 유명한 김상헌의 손자로 노론을 대표했던 인물이다. 그래서 형 김수흥, 민정중과 함께 조정 내 노론 산당의 여론을 주도했다. 1675년 숙종이 남인을 중용하고, 남인과 가까웠던 복창군 형제를 유배에서 풀려나게 하자 김수항은 이를 비판하는 강경한 소를 올려 결국 유배되었다. 이때 전남 영암에 소재한 구림으로 귀양을 왔다.
노론 이끌었던 아버지 김수항의 유지를 따른 두 형제
김수항의 아들들은 영암 유배지를 찾아 아버지 수발을 들었다. 1677년 가을에는 아버지를 모시고 월출산 유람에 나섰다. 이때 창흡·창즙 형제도 월출산 아래의 백운동별서를 함께 방문했다. 그런데 김수항의 아들 중에서 어째서 창흡·창즙만 백운동별서를 찬미하는 시를 지었을까? 큰형 창집은 1678년 6월에 별서를 방문한 기록만 있고 찬미한 글은 따로 없다. 동생인 창흡·창즙과 추구했던 삶의 가치가 서로 달랐기 때문으로 보인다. 창집은 세속적 출세에 비중을 둔 반면 두 동생은 세속에서 벗어나 무위자연에 따른 삶을 살고자 했다.
그런데 이들 형제는 어째서 서로 다른 삶을 살았을까? 김수항은 영의정을 지냈지만 1689년 기사환국으로 남인이 집권하자 노론 영수였던 그도 정치적으로 몰려서 진도에 유배된 뒤 사사되었다. 그가 사사되기 직전 자식들에게 한 유언이 세속 정치에 절대 참여하지 말라는 것이었다. 창흡과 창즙을 비롯한 동생들은 아버지 유언을 충실히 따라 일절 벼슬을 지내지 않고 대신 학문과 문장으로 일가를 이루었다. 이런 삶을 추구했기에 백운동별서를 보고 노장적 시상이 자연스레 떠올랐다고 본다.
반면 창집은 아버지 유언을 거역하고 조정에 나아갔다. 그리고 숙종 때는 영의정까지 올랐다. 그 후 서인이 노론과 소론으로 나뉘면서 소론 맹장인 김일경의 고발로 신임사화가 발생하자 거제도에 유배되었다가 경북 성주에서 사약을 받고 죽었다. 창집이 사약을 받고 죽을 때 아버지 유언을 따르지 않은 것을 얼마나 후회했을까?
그런데도 창집의 후손들은 할아버지 죽음으로부터 어떤 교훈을 얻지 못한 것 같다. 그의 4대 직계손이 바로 안동 김씨 세도정치를 열었던 김조순이기 때문이다. 또 그의 아들 유근과 좌근, 그리고 그의 조카 홍근과 흥근은 안동 김씨 세도정치를 이끈 핵심 인물들이 아닌가. 이처럼 창집의 후손들은 권력의 세계를 좀체로 벗어나지 못했다. 안동 김씨 세도정치가 남긴 폐해를 떠올린다면 과연 어떤 삶이 의미 있는 삶인지 한 번쯤 심각하게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장자》 '양생주' 결론부에 이런 말이 있다. "기름은 한번으로 활활 타고 없어지지만 불씨는 작아도 끊임없이 이어진다." 우리가 세속에 집착해서 살면 기름처럼 활활 탈 수 있다. 그렇지만 이런 삶은 한탕으로만 끝날 뿐이다. 그래서 불씨처럼 살아가는 삶이 소박해 보여도 소중하다. 나이가 들수록 이런 생각이 더욱 든다. 백운동별서의 입산조인 이담로가 혹시 장자가 말하는 기름이 아니라 불씨처럼 살아간 사람이 아닐까? 백운동별서를 한 번 방문했는데도 그의 삶이 필자의 마음에서 지워지지 않고 갈수록 짙어지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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