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울어진 운동장

황예랑 기자 2021. 10. 3. 10: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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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리재에서]

1382호 표지이미지

운동을 눈으로만 배웠다.

중학교 때는 농구와 배구, 고등학교 때는 야구 경기에 홀렸다. 시험 기간에도 하루 몇 시간씩 텔레비전 앞을 떠날 줄 모르는 사춘기 딸을 보며 속이 까맣게 타들어갔노라고, 엄마는 십수 년이 지나서야 흘겨보며 말했다. 운동에 미쳐 공부는 뒷전이었다. 땀내 나는 경기와 선수들을 직접 두 눈으로 보겠다며, 경기장은 물론이고 심지어 모 대학 농구부가 연습하는 체육관까지 쫓아다녔다. 인생 통틀어, 운동에 대한 열정 최대치를 그때 다 써버렸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눈이 아니라 몸으로 운동을 배워야겠다는 생각은 눈곱만큼도 들지 않았다.

사실 나는 운동과는 거리가 멀고 먼 유형의 인간이다. 중학교 1학년 1학기 성적표에 찍힌 체육 점수는 ‘양’이었다. 우도 미도 아니고 무려 ‘양’이라니. 인생 통틀어 최악의 성적표를 받고는 ‘내 인생에서 체육만큼은 양보하겠다’고 마음먹었다. 딱히 양보라고 할 것도 없었다. 몸으로 부딪혀 운동을 배울 일 자체가 많지 않았다. 여중, 여고를 다니면서 체육 시간에 해본 팀 스포츠라고는 피구가 유일했다. 쉬는 시간이나 점심시간에 운동장에서 뛰어노는 친구는 없었다. 체육 점수를 따느라 팔에 시퍼렇게 멍이 들 때까지 배구 리시브 연습을 했지만 체육 선생님은 여고생들에게 실전 경기를 시키지는 않았다.

이제 와서 돌이켜보면, 운동을 눈으로만 배울 만도 했다. 눈으로 열심히 쫓아다닌 운동선수는 모조리 남자들이었다. 축구나 야구 등 구기 종목은 대부분 남자들만 하는 운동이었으므로. 여자 프로야구팀은 없고 그때만 해도 여자 농구나 배구 경기는 비인기 종목이어서 텔레비전 중계를 해주지 않았다. 나도 모르게 운동은 남자들의 영역이라는 마음속 ‘보이지 않는’ 선을 그었다. 여자의 몸도 역시 튼튼해야 한다는 생각까지 미처 닿지 못했다.

요즘 다시, 운동을 눈으로 배우고 있다. 마흔 살이 가까워오자 몸 여기저기가 아프기 시작했다. 평소 운동하지 않은 벌이었다. 허리디스크 때문에 꼼짝없이 한 달간 누워만 있고 나서는, 살기 위해 운동해야겠다 마음먹었다. 하지만 이번에도 여지없이 눈으로 먼저 배웠다. 책을 열심히 읽었다. <마녀체력: 마흔, 여자가 체력을 키워야 할 때> <근육이 튼튼한 여자가 되고 싶어> 등을 눈으로만 읽고 몸은 움직이지 않았다. 여든 살이 넘은 루스 베이더 긴즈버그 대법관이 매일 플랭크 자세로 운동하는 모습을 다큐멘터리영화에서 보면서, 책을 읽을 때 그랬듯이 비슷한 다짐과 후회만 거듭했다.

여전히 운동을 몸으로 배우겠다는 열정은 샘솟지 않는다. 나는 그대로이지만 다행히 세상은 조금 더 나아졌다. 이제는 ‘운동하는 여자들’에 대한 금기 따위는 사라졌다. 국가대표 여자 배구팀의 박력 있는 경기를 보며 즐거워하고, 축구하는 평범한 여자들의 이야기인 <골 때리는 그녀들>이 인기다. 추석 연휴에 <골 때리는 그녀들> 결승전을 보면서 ‘FC 불나방’ 팀을 응원하는 엄마는 ‘FC 국대패밀리’ 팀을 응원하는 초등학생 딸에게 물었다. “학교에서 피구 말고 축구하는 언니들 본 적 있어?” “응! 고학년 언니들은 체육 시간에 축구하던데?” 아, 축구하는 여자가 이제는 낯선 존재가 아니라니! 엄마는 ‘기울어진 운동장’에 서서 지레 겁먹고 포기해버렸는데, 너는 운동장 한복판을 마구 신나게 뛰어다니겠구나.

이번호에는 박다해·신지민 기자가 ‘운동하는 여자들’의 멋진 이야기를 전한다. “남자아이들은 초등학교에 들어가면서부터 축구클럽이든 농구팀이든 자연스럽게 만들어지는데 여자아이들은 발레를 하거나 살 빼야 한다며 줄넘기하는 식이죠. 어머니들도 팀 스포츠를 경험하지 않았기 때문에 내 딸에게 가르칠 생각이 없어요.” 신혜미 위밋업스포츠 공동대표의 말에 가슴이 뜨끔했다. 당장 농구공이라도 사야겠다.

황예랑 편집장 yrcomm@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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