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하면 본전, 못하면 나락" 대선 가르는 한방..TV토론 흥망사

강윤주 2021. 10. 2. 20:00
음성재생 설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15대 대선부터 도입, 가성비 높은 검증수단
안철수 'MB아바타·갑철수' 대표적 실패 사례 박빙일수록, 부동층에게 영향력 더 크게 발휘
2017년 제19대 대선 TV토론에서 안철수 국민의당 후보가 문재인 더불어민주당 후보에게 '제가 MB 아바타'냐고 반복해 질문하는 장면. YTN 유튜브 화면 캡처

"제가 MB(이명박) 아바타입니까", "제가 갑(甲) 철수입니까, 안철수입니까"

2017년 4월 23일 중앙선거관리위원회가 주최하는 제19대 대통령선거 1차 TV토론회. 외교 안보와 정치 개혁을 주제로 열린 토론회에서 안철수 국민의당 후보(현 대표)가 문재인 당시 더불어민주당 후보를 몰아세우며 반복해 외친 질문입니다.

토론 주제와 동떨어진 '갑철수', 'MB 아바타'의 난데없는 등장. 민주당의 네거티브 공세를 비판하려는 의도로 안 후보가 준비한 회심의 카드였지만 도발은 끝내 '셀프 디스'로 귀결되고 말았죠. 안 후보 스스로 "안철수=갑철수" "안철수=MB 아바타"라는 부정적 프레임에 가둬버리는 역효과를 낳으면서 말입니다.


안철수 'MB아바타' 토론, 대선 패배 뼈아픈 실책

2017년 19대 대선 TV토론에서 안철수 국민의당 후보가 문재인 더불어민주당 후보에게 '제가 갑철수냐, 안철수냐'고 반복해 질문하는 장면. 유튜브 채널 오마이TV 화면 캡처

이 토론회를 기점으로 안 후보 지지율은 내리막길을 걸었습니다. (한국갤럽 2017년 4월 4주차 조사 참고) 전주까지 30%대를 유지하며 선두인 문재인 당시 민주당 후보를 바짝 쫓아가는 모양새였지만, 토론회 직후 실시된 여론조사에선 지지율이 24%로 떨어지며 격차가 벌어지기 시작했거든요.

지지율 추락에 TV토론이 결정적 영향을 미쳤다는 건 여론조사 수치로도 확인됩니다. 같은 기간 조사에서 'TV토론을 가장 잘한 후보가 누구인지'를 묻는 질문에 안 후보라고 응답한 답변은 6%에 그치며 5명의 후보 중 꼴찌를 기록했고, '토론회 후 이미지가 나빠졌다'는 응답 역시 44%로 안 후보가 가장 높았습니다. 이후 총 다섯 번의 토론회를 거쳤지만 안 후보는 깎아 먹은 지지율을 만회하지 못하고 결국 3위(21.4%)로 대선을 마치고 맙니다.

19대 대선을 앞두고 열린 대선후보 토론회에서 심상정(왼쪽부터) 정의당 후보, 홍준표 자유한국당 후보, 유승민 바른정당 후보, 문재인 더불어민주당 후보, 안철수 국민의당 후보가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국회사진기자단, 한국일보 자료사진

대선 직후 한국갤럽이 내놓은 '대통령 선거 사후 조사'에서도 또 한번 확인할 수 있는데요. '안철수 국민의당 후보에게 투표하지 않은 이유'를 묻는 질문에 '경험·역량부족'(23%) 다음으로 많은 답변은 'TV 토론 잘못함'(9%)이었습니다. 오죽하면 국민의당 대선 평가 보고서에서도 "안 후보가 TV토론에서 대통령감이라는 각인을 하는 데 실패했다"며 TV토론을 패인으로 꼽았을까요. 안 후보에게 2017년 대선 토론은 그야말로 악몽이었을 겁니다.


후보 역량 비교 평가하는 데 가성비 높은 검증 수단

지난 7월 5일 JTBC와 MBN 공동 주최로 열린 더불어민주당 대선 예비경선 후보 토론회에서 도덕성 검증에 나선 정세균 후보가 이재명 후보의 사생활 관련 질문을 던지자, 이 후보가 '바지 한번 더 내릴까요'라고 답해 논란이 일었다. 연합뉴스 유튜브 화면 캡처

누구에겐 지우고 싶은 기억이겠지만, 또 다른 누구에겐 절호의 기회인 대선 TV토론의 계절이 어김없이 돌아왔습니다. 특히 이번 대선은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으로 대면 홍보와 유세가 제한되다 보니 TV토론의 역할이 절대적으로 커지는 모습인데요.

10월 초 대선 후보를 선출하는 더불어민주당은 예비경선(컷오프) 포함 모두 11회의 TV 토론 일정을 진행 중이고, 2차 컷오프에 들어간 국민의힘은 9월 중순부터 10월 초까지 여섯 번의 TV토론을 실시하는 강행군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본선에 진출하는 후보는 중앙선거관리위원회가 주최하는 공식 대선 TV 토론까지 치러내야 하니, 대선은 TV토론에서 시작했다가 TV토론에서 끝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죠.

지난달 26일 채널A 주관으로 열린 국민의힘 대선주자 3차 토론회에서 홍준표 의원과 윤석열 전 검찰총장이 토론을 벌이는 장면. 김여정 북한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 부부장 담화에 대해 묻는 홍 의원의 질문에 윤 전 총장은 담화 내용을 숙지 못한 듯 누가 언제 얘기했는지 되묻고 있다. 뉴스A라이브 화면 캡처

각자 처한 상황에 따라 '굳히기'와 '뒤집기'를 노려볼 수 있는 만큼 후보들은 TV토론을 열심히 할 수밖에 없습니다. 유권자 입장에서도 대선 후보들의 정책 기조와 식견, 도덕성을 따져보고, 다른 후보와도 실시간으로 비교할 수 있다는 점에서 가성비 높은 검증 도구로 TV토론에 대한 주목도가 커지고 있죠. 대선 드라마에 없어서는 안 될, 약방에 감초가 된 TV토론의 역사와 영향력 등 이모저모를 살펴봤습니다.


한국 대선 첫 TV 토론, 최대 수혜자는 김대중

한국 대선 TV토론의 효시는 1997년 치러진 제15대 대선이다. 당시 이회창(왼쪽부터) 한나라당 후보, 김대중 새정치국민회의 후보, 이인제 국민신당 후보가 TV합동토론회에 앞서 손을 잡고 포즈를 취하고 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우리나라 대선에서 TV토론이 처음 도입된 건 김대중 새정치국민회의 후보와 이회창 한나라당 후보가 맞붙었던 1997년 제15대 대통령 선거였습니다.

후보 본연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보여줄 수 있다는 게 TV토론의 최대 장점일 텐데요. 간첩조작 사건 등 권력에 의해 '빨갱이'로 낙인 찍혀온 김대중 전 대통령에게는 이미지를 쇄신할 절호의 기회였죠. 실제 김 전 대통령은 1970년대부터 대선 TV 토론회 도입을 주장해왔던 것도 이런 복안이 깔려 있었습니다.

2002년 16대 대선 TV토론회에서 이회창(왼쪽부터) 한나라당 후보, 노무현 새천년민주당 후보, 권영길 민주노동당 후보가 손을 맞잡고 포즈를 취하고 있다. 권영길 후보는 "국민 여러분 살림살이 나아지셨습니까"라는 유행어를 만들어내며 토론회 스타로 떠올랐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논리적 언변과 식견을 쏟아낸 김 전 대통령의 토론전 데뷔는 성공적이었죠. 당시 토론에선 국제통화기금(IMF) 외환위기 이후 '경제파탄 책임론'이 주요 이슈로 떠올랐는데, 김 전 대통령은 구체적 경제 수치 등을 제시하며 이회창 후보를 코너로 몰아세우며 유권자들의 눈길을 사로잡았죠. 토론회 이후 김 전 대통령의 지지율은 상승세를 탔고, 이회창 후보는 하락세를 보였는데 대선 결과 역시 다르지 않았습니다.

고(故) 이희호 여사는 2016년 한겨레와 인터뷰에서 "TV토론회에서 남편은 신문 기사나 방송 뉴스가 왜곡하지 않은 모습을 그대로 국민에게 보여줄 수 있었다"며 "남편의 대통령 당선은 TV토론 덕분"이라는 말을 남기기도 했죠.


TV토론 '떠오른 스타' 권영길, '비호감 낙인' 이정희

2012년 제18대 대선을 앞두고 중앙선관위원회 주최로 열린 TV토론회를 앞두고 당시 박근혜(왼쪽부터) 새누리당 후보, 이정희 통합진보당 후보, 문재인 민주통합당 후보가 인사를 나누고 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TV토론은 예상치 못한 스타도 탄생시키는데요. 노무현 새천년민주당 후보와 이회창 한나라당 후보의 양강 구도에서 치러진 2002년 16대 대선 TV토론회의 최대 수혜자는 제3후보였던 권영길 민주노동당 후보였습니다.

"국민 여러분 행복하십니까, 살림살이 좀 나아지셨습니까"라는 유행어를 만들어 내면서 토론회 직후 여론조사에서 최대 10%포인트까지 지지율이 급상승했죠. 권 후보는 대선에서도 3.9%의 득표율(95만7,000여 표)을 기록하며 조봉암 이후 진보정당 후보 중에서 가장 많은 표를 얻은 기록을 세우기도 했죠.

이명박 한나라당 후보가 압승했던 2007년 17대 대선은 선거전 초반부터 판세가 기울어져 있었던 만큼 TV토론 역시 크게 흥행하지 못했습니다.

문재인 민주통합당 후보와 박근혜 새누리당 후보가 맞붙었던 2012년 18대 대선에선 이정희 통합진보당 후보가 비호감 캐릭터로 급부상하면서 이미지 타격을 입었죠. "이것만 기억하시면 됩니다. 박근혜 후보 떨어트리기 위한 겁니다. 저는 박근혜 후보를 반드시 떨어뜨릴 겁니다"라고 막말을 퍼부었는데요, 오히려 박근혜 전 대통령의 당선을 도왔다는 평가마저 나왔던 '독한' 장면이었습니다.


박빙일수록, 무당층에게 더 큰 힘 발휘하는 TV토론

더불어민주당 대선 경선 후보들이 지난달 28일 서울 목동 SBS에서 열린 '더불어민주당 제20대 대선 후보 TV토론회에 참석,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왼쪽부터 이재명, 박용진, 이낙연, 추미애 경선 후보. 국회사진기자단. 연합뉴스

이처럼 역대 대선에서 TV토론은 절대적 변수는 아니지만,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영향력을 행사해 왔는데요. 특히 선거 판세가 박빙일수록 폭발력은 더 커지고, 무당파나 지지 강도가 약한 유권자 등에 더 큰 영향력을 발휘하게 된다는 게 전문가들의 공통된 견해입니다. "잘하면 본전이지만, 실패하면 나락"으로 떨어질 수 있다는 점에서 TV토론은 대선 판세를 가르는 '한방'이라고 볼 수도 있는 거죠.

국민의힘 대선 경선 후보들이 지난달 16일 서울 중구 TV조선 스튜디오에서 열린 제20대 대통령선거 경선 후보자 1차 방송토론회에 참석해 선전을 다짐하며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왼쪽부터) 황교안, 홍준표, 하태경, 유승민, 최재형, 원희룡, 안상수, 윤석열 후보. 뉴스1

실제 2017년 대선에서 대선 TV토론을 보고 지지 후보 선택을 바꿨다는 여론조사 결과도 있습니다. 한겨레경제사회연구원 의뢰로 리서치플러스가 실시한 여론조사를 보면 'TV토론을 보고 후보 선택에 변화가 있었느냐'는 질문에 응답자의 21.5%가 지지 후보를 바꾸는 쪽으로 변화가 있었다고 답했는데요, '지지하던 후보를 더 지지하게 됐다'는 응답도 19.1%에 달했죠. 결국 국민 10명 중 4명꼴로 TV토론을 후보자 선택 기준으로 삼고 있다는 점을 보여주는 거죠.

여느 대선보다 치열하게 맞붙은 이번 20대 대선. TV토론에서 누가 웃고 울게 될지, 그래서 대선 당일날 누가 웃고 울게 될지, 결국 후보 본인 하기에 달려 있겠죠.

강윤주 기자 kkang@hankookilbo.com

Copyright © 한국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