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발 여성은 100년째 전쟁중..허영심 아니면 성적 대상?
모던걸 100년 수난사
1920∼30년대 모던걸 다룬 만문만화
사치스럽다 비판하며 눈요기 삼아
그저 '편리해서' 선택했을 뿐인데
지금도 여성선수 머리·유니폼 논란
한국은 여성 운동선수의 헤어스타일 하나로도 무려 ‘논란’이 되는 나라다. 도쿄올림픽 양궁 금메달 3관왕에 오른 안산 선수의 쇼트커트 이야기다. 안 선수의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왜 머리를 자르냐”는 댓글이 달린 후, 안 선수가 “그게 편하니까요”라는 답을 달자 당장 ‘안산 선수는 페미니스트’라는 딱지가 붙었다. 선수의 외모 ‘논란’이 ‘페미니즘’이라는 사상 검증으로 엉뚱하게 옮겨붙은 것이다. 이처럼 단발 신여성에 대한 사회적 평판은 호의적이지 않았다.
사실, 여성의 헤어스타일을 두고 사회적 스캔들이 발생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100년 전 조선에도 비슷한 일이 있었다. 거리에 단발머리의 ‘모던걸’이 등장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들의 새로운 외양은 사회에 충격을 안겼다. 표지에 단발한 여성을 내건 잡지 <신여성> 1925년 8월호는 ‘여자의 단발’을 주제로 찬반양론 특집 기사를 게재했다. <별건곤> 1926년 12월호는 아예 ‘단발랑(斷髮娘, 단발한 젊은 여성) 미행기’라는 글까지 실어, 별종을 대하듯 단발 여성을 보는 사람들의 시선과 수군거림을 중계했다.
허영의 상징, 관음의 대상
이유를 짐작하는 건 어렵지 않다. ‘모던’(modern)을 ‘모단’(毛斷)으로 표기할 만큼 단발은 근대성의 표상이었다. <불량소녀들>의 저자 한민주가 지적한 대로 “댕기 머리를 싹둑 자르는 행위만으로도 남성들은 가부장제가 강요해온 전통적인 여성상에 균열이 가고 있음”을 감지해냈기 때문이리라. 이때부터 모던걸은 조선 사회에서 마음껏 평가받고 조롱받을 수 있는 대상이 되었다. 21세기 대한민국의 페미니스트가 비난받는 것처럼, 20세기 조선의 모던걸도 발음을 비틀어 ‘못된껄’, ‘뺏껄’(bad girl), 즉 불량소녀로 해석되어 허영과 사치, 퇴폐와 타락의 이미지로 형상화됐다. 만문만화가 안석주(1901~1950)가 풍자한 모던걸의 모습도 그중 하나다.
안석주가 1928년 <조선일보>에 게재한 ‘모던걸의 장신(裝身)운동’을 보자. 전차를 탄, 단발의 모던걸들이 손잡이를 잡고 줄지어 서 있다. 이상한 점은 좌석이 텅 비어 있는데도 한명도 앉지 않았다는 것. 그 이유는 손잡이를 잡고 서 있어야 ‘모던’과 ‘부유함’을 동시에 자랑할 수 있는 손목시계와 보석 반지가 잘 보이기 때문이다. 안석주는 이들을 내려다본 각도로 처리해 손목시계와 반지를 더 과장해서 크게 그리고 있다. 또 개성 없이 동일한 모습으로 처리함으로써 모던걸을 근대라는 유행에 지각없이 휩쓸린 이들로 희화화하고 있다.
이는 만화 옆에 게재한 ‘만문’(漫文, 흐트러진 글)으로도 알 수 있다. 만문만화란 말 그대로 만문과 만화가 붙어 있는 장르로, 현대 만화에 말풍선이 있는 것과는 달리 만문만화는 서술문으로 의미를 전달한다. 안석주는 ‘모던걸의 장신운동’에 다음과 같은 만문을 붙였다. “이 그림과 가티 녀학생 기타 소위 신녀성들의 장신운동이 요사이 격열하야졌나니 항용 뎐차 안에서 만히 볼 수 있는 것이다. 황금팔뚝시계-보석반지―현대녀성은 이 두가지가 구비치 못하면 무엇보담도 수치인 것이다. 그리하여 뎨일 시위운동에 적당한 곳은 뎐차 안이니, 이 그림 모양으로 큰 선전이 된다.” 즉 안석주는 모던걸을 물질만 밝히는 허영심 넘치는 존재로 여긴 것이다.
당대 남성들은 한 손으로는 모던걸을 향해 이처럼 대차게 손가락질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모던걸을 자신들의 시각적 쾌락을 위한 은밀한 ‘눈요깃거리’로 삼기도 했다. 여성이 규방에 갇혀있을 동안 자유롭게 거리를 어슬렁거릴 수 있었던 남성들에게, 단발의 모던걸은 도시의 스펙터클 그 자체였으리라. 남성 산책자들은 거리로 나온 모던걸을 보며 관음의 욕망을 충족하면서도 동시에 이들의 ‘방탕함과 타락’을 강조하며 깎아내리는 것도 잊지 않았다.
안석주의 ‘모던걸의 행렬’은 모던걸의 몸을 거리의 장식품으로 인식하는 남성의 시선이 잘 드러나는 그림이다. 그림 중앙의 노출이 심한 서구식 드레스를 입은 모던걸을 중심으로 짧은 치마에 여우 목도리를 한 모던걸, 아래에는 하의 속옷만 입은 모던걸의 앞모습과 뒷모습이 보인다. 안석주에게 모던걸이란 하나같이 육체를 관능적으로 노출한 여성일 뿐이다. 그런데 이 그림에서 주목할 점은 따로 있다. 안석주는 중앙의 모던걸을 기준으로 여성의 신체를 파편화해 상품처럼 늘어놓았다. 보석이 박힌 이마, 피어싱 한 코, 화려한 양말에 하이힐을 신은 다리, 거대한 보석 반지를 끼고 매니큐어를 칠한 손. 안석주의 그림 속에서 여성의 몸은 성적 대상화 되어 조각조각 선정적으로 소비될 뿐이다.
흐르지 않은 시간
그로부터 100년이 지난 오늘날은 어떨까. 여성의 머리 모양 하나에 옛 남성이나 현대 남성이나 똑같이 발끈한 것처럼, 여성의 몸을 파편화하고 성적 대상화 하는 것도 그때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다. ‘남성같이’ 머리를 자른 여성 선수를 비난하면서 한편으로는 체조, 수영, 비치발리볼, 육상 등 노출 많은 경기복을 입는 여성 선수들의 몸 일부분을 클로즈업해 촬영하는 것만 봐도 그렇다. 그러나 이제 더이상 여성들은 가만히 있지 않는다. 안산 선수를 두고 성차별적 괴롭힘이 일어나자, 여성들은 앞다퉈 ‘쇼트커트 인증’을 했다.
‘성적 대상’이 되지 않겠다는 여성 선수들의 움직임도 있었다. 도쿄올림픽 독일 여자 기계체조 대표팀이 몸통에서부터 발목 끝까지 가리는 ‘전신 유니폼’을 입고 출전한 것. 그동안 여자 기계체조 선수들이 원피스 수영복에 소매만 덧대져 하반신 노출이 많았던 ‘레오타드’ 유니폼을 주로 착용해왔던 것과 대조적이다. 역시나 이 뉴스를 전하는 댓글창에는 “페미니즘이 올림픽에까지 왔다” “신경도 안 쓰는데 예민하다”는 비난이 달렸다. 하지만 대표팀 소속인 자라 포스 선수는 영국 <비비시>(BBC)와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설명했을 뿐이다. “기계체조는 18살 미만의 어린 선수들이 대다수다. 생리를 시작하고 사춘기가 되면 노출이 심한 레오타드를 입는 게 불편하다.” 이 말에 따르면 안산 선수의 쇼트커트 이유와 마찬가지로 ‘편하기 때문에’ 유니폼을 바꿔 입은 셈이다.
1925년 8월, 몇년 후 사회주의 운동가로 활동하게 될 주세죽(1901~1953)은 잡지 <신여성>에 이렇게 썼다. “나는 단발을 주장하는 것이 하등 새 사상이나 주의를 표방함이 아니오. 또한 일시 신유행에 감염되어 기분으로나 양풍, 중독으로써 주장함이 아니외다. 실생활에 임하여 편리하고 또한 위생에 적합한 여러 가지 이점을 발견한 까닭입니다. 남자들이 양복을 입은 것은 편리한 점이 있기 때문이외다. 여자의 단발도 역시 그렇습니다.” 이 글의 제목은 ‘나는 단발을 주장합니다. 우리의 실생활에 비추어 편의한 점으로’다. 1925년의 주세죽의 말과 2021년의 안산, 자라 포스의 말이 소름 끼치게 똑같다. 100년이란 시간은 여성들 사이에서는 흐르지 않았던 셈이다.
<화가의 출세작> <화가의 마지막 그림> <캔버스를 찢고 나온 여자들>을 냈다. 그림을 매개로 권력관계를 드러내고, 여기서 발생하는 부조리를 다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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