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레반 정부를 둘러싼 눈치게임

김영미 다큐엔드뉴스 코리아 대표기자 2021. 10. 2. 14:54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경향신문]

지난 9월 19일(현지시간) 아프가니스탄 수도 카불의 전 여성부 청사 앞에서 탈레반 대원이 지켜보는 가운데 여성 권리 증진을 요구하는 시위가 벌어지고 있다. / 카불 AFP=연합뉴스


탈레반이 아프가니스탄에서 정권을 잡은 지 한달이 됐다. 그동안 탈레반은 ‘과도정부’를 구성하고 새 내각을 발표했다. 하지만 새 내각에는 소수민족이 정말 소수 포함됐고, 여성은 전무하다. 이를 두고 국제사회는 탈레반에 대한 의구심을 거두지 못하며 각국의 입장에서 관계 설정을 고민 중이다. 어제의 테러단체가 한 나라의 정권 주체가 되면서 각 나라는 어떻게 국제관계를 설정해야 할지 혼란스러워하고 있다는 얘기다. 이는 한국도 마찬가지다. 현재 국제사회가 탈레반과의 관계 설정을 어떻게 하느냐는 향후 한국과 탈레반 과도정부와의 관계 설정에도 많은 영향을 미칠 수 있다. 그래서 탈레반과 국제사회가 어떻게 시시각각 움직이는지에 촉각을 세우고 있다.

■유엔, 탈레반 과도정부 인정할까

최근 탈레반 과도정부는 미국 뉴욕에서 열린 제76차 유엔총회에 참석 의사를 밝혔다. 아프가니스탄 전 정부가 임명한 굴람 이삭자이 유엔 대사의 자격을 박탈하고, 새롭게 임명한 탈레반 과도정부 대사의 유엔총회 연설 승인을 요청한 것이다. 탈레반이 공식적으로 유엔 무대에 서겠다는 이야기다. 탈레반 측은 또 지난 9월 15일과 20일 두차례에 걸쳐 안토니우 구테흐스 유엔 사무총장에게 고위급 회담 참여를 요청하는 서한을 보냈다. 첫 번째 서한에는 이번 총회에 참석할 아프간대표단 명단을, 아미르 칸 무타키 탈레반 외무부 장관이 보낸 두 번째 서한에는 모하마드 수하일 샤힌 대변인을 아프간의 새 유엔대사로 임명한다는 내용이 담겼다. 무타키 장관은 서한에서 “아슈라프 가니 전 아프간 대통령은 지난달 축출됐기 때문에 전 정부가 임명했던 이삭자이 대사가 더는 아프간을 대표하지 않는다”고 밝혔다.

현재 탈레반의 가장 큰 염원은 국제사회에서 합법 정부로 인정받는 것이다. 유엔이 탈레반이 원하는 바를 수락한다면 다른 국가들도 탈레반과 외교관계를 인정해야 하는 상황이 될 수 있다. 결과는 탈레반이 의도한 대로 되지 않았다. 하지만 이런 상황은 유엔 입장에서는 진땀을 흘릴 수밖에 없었다. 탈레반이 유엔 무대에 공식적으로 선다는 것은 국제사회가 그들을 합법적인 아프가니스탄 정부로 인정한다는 말인데 이는 누가 봐도 아직 결정짓기 힘든 사안이다. 이 불똥을 유엔이 가장 먼저 맞은 셈이 되기 때문이다. 와중에 셰이크 타밈 빈 하마드 알 타니(41) 카타르 국왕이 미국 뉴욕 유엔총회장 연단에 올랐다. 지난 9월 21일 그는 국제사회를 향해 “탈레반과 대화를 지속하는 것이 중요하다”며 “그들을 거부하는 것은 대립과 반발을 부를 뿐이며, 대화가 성과를 낼 수 있다”며 탈레반과 국제사회가 어서 협력하라는 메시지를 전달했다.

아프간 탈레반 정권의 아미르 칸 무타키 외교부 장관이 지난 9월 14일(현지시간) 수도 카불에서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그는 이 자리에서 인도적 차원의 국제 지원을 요청했다. / 카불 AFP=연합뉴스


■중재자 역할 나선 카타르·터키

카타르는 지난 수년간 미국과 탈레반이 평화협정을 논의할 때 장소를 제공했고, 탈레반 정치 사무소를 수도 도하에 세울 수 있게 허용했다. 그만큼 탈레반에 우호적인 국가다. 지난 8월 31일 미군이 아프가니스탄에서 완전철군한 뒤 관제사가 없어 카불공항이 아수라장이 되자 카타르는 공항 시설 수리를 위한 기술팀을 파견하기도 했다. 특히 지난 9월 10일, 아프간을 미처 빠져나가지 못한 외국인들을 위해 카타르항공 전세기를 띄웠다. 카타르는 탈레반과의 관계를 막역하게 쌓으며, 이번 사태에서 중재자와 해결사 역할을 하고 있다.

해결사 역할을 자청한 나라는 또 있다. 터키다. 터키 정부는 올해 5월 미군이 철수 작업을 시작할 당시 인도적 긴급 물품 지원과 함께 미국에 카불공항 운영 및 경비 임무를 맡겠다고 했다. 또한 메블뤼트 차우쇼을루 터키 외무장관은 카불공항의 운영을 위한 탈레반의 협력 제안을 긍정적으로 생각한다는 의견을 냈다. 오랫동안 공들인 카타르와 달리 터키가 갑자기 중재자 입장으로 나선 것은 탈레반이 터키와 카타르 등에 카불공항 운영을 위한 지원을 요청했기 때문이다. 이슬람교도들이 많을 뿐 아니라 같은 수니파 입장에서 탈레반이 먼저 제안한 것이므로 터키는 중동의 외교적 입지를 견고히 할 수 있다. 또한 ‘유럽연합(EU) 가입’이라는 숙원 사업을 이참에 탈레반을 이용해 해결하려는 목적도 있어 보인다. 서구사회가 탈레반과의 외교적 관계 설정에 머리 아픈 상황에서 터키가 서구사회와 탈레반의 중개자 역할을 지렛대 삼아 EU 가입을 추진하겠다는 것이다. 유럽 의회는 터키 정부의 인권 탄압 및 법치 훼손을 이유로 EU 가입에 부정적인 상황이다. 결국 터키는 자국의 이익을 위해 기꺼이 탈레반의 제안에 화답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EU 회원국들 관계 설정 고민

이런 상황에 호세프 보렐 EU 외교안보정책 고위대표는 지난 9월 14일, 유럽 의회 연설에서 EU가 아프간의 새 정권과 협력해야만 미래 발전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 발언했다. 이는 탈레반과 사실상 외교관계를 맺는 것이 불가피하다고 공식적으로 선언한 셈이다. 하지만 탈레반과의 협력을 어디까지 해야 하는지에 대한 기준은 아직 마련하지 못했다. EU에게도 탈레반의 여성 인권유린 문제가 걸림돌로 작용할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독일의 메르켈 총리도 “독일 정부와 함께 일했던 아프간 사람들을 대피시키기 위해서는 탈레반과 협상해야 한다”며 “이제 그들이 아프간을 장악했고 정치적 문제는 그들이 쥐고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프랑스는 탈레반 과도정부에 상당히 부정적이다. 장 이브 르드리앙 프랑스 외무장관은 지난 9월 3일 자국 언론 르 피가로에 “우리는 탈레반이 사람들의 국외 대피와 인도적 지원의 접근을 허가하고 모든 테러단체와 연결고리를 끊으며 인권, 특히 여성인권을 존중하는지 여부를 두고 판단할 것”이라고 말했다. 탈레반이 합법 정부로 인정받으려면 프랑스의 기준을 충족시켜 달라는 얘기다. 그러면서 그는 “현재로서는 탈레반이 이러한 방향으로 가고 있다는 징후를 찾지 못했다”고 못을 박았다.

EU 회원국은 탈레반과의 관계 설정을 어떻게 할 것인지에 대해 의견을 모으지 못한 상태에서 국방·외무장관들이 긴급회의를 열었지만 별 성과 없이 끝났다. 유럽 각 나라가 어떤 의견을 내도 국제적 기준에 맞는 탈레반의 인권존중 약속이 없이는 공염불이 될 수밖에 없다. 탈레반 과도정부에게 주어진 가장 큰 숙제는 ‘인권’과 ‘알카에다와의 관계’다. 이 부분에 대해 국제사회와 완전한 신뢰가 쌓이지 않으면 탈레반을 외교 파트너로 인정하기에는 어떤 나라든 정치적으로 부담스럽다.

아프가니스탄 수도 카불에서 지난 9월 17일(현지시간) 한 남성이 탈레반에 의해 폐쇄된 전 정부의 여성부 건물 입구를 지나고 있다. 여성부 건물 현판 자리에는 ‘기도·훈도 및 권선징악부’ 간판이 걸려 있다. / 카불 AFP=연합뉴스


■탈레반, 알카에다 ‘손절’ 선언

탈레반은 영리하게 움직이고 있다. ‘테러단체와의 관계 단절’ 방침을 강조한 것이다. 탈레반은 이슬람국가(IS) 등 극단주의 테러조직이 아프간 영토에 발을 붙이지 못하도록 하겠다고 재차 강조하고 나섰다. 지난 9월 14일, 아미르 칸 무타키 탈레반 과도정부 외교부장관은 기자들과 회견에서 “우리는 누구든, 어떤 그룹이든 다른 나라에 대항해 우리 영토를 이용하는 걸 허용하지 않을 것”이라고 밝혔다. 지난해 탈레반이 카타르 도하에서 미국과 맺은 협정에 담긴 “알카에다 등 무장테러조직들과 관계를 끊겠다”는 약속을 지키겠다는 것이다. 이는 탈레반 입장에서 엄청난 파격이다. 미국과 탈레반의 평화협정 논의 단계에서 가장 첨예하게 대립했던 것이 탈레반과 알카에다의 관계다. 논의 초기에 탈레반은 알카에다와의 관계를 끊을 수 없다는 입장이었지만 이후 이를 철회하며 아프간 차기 정권 창출을 위해 알카에다를 버리겠다고 입장을 바꿨다. 탈레반에게 알카에다는 아프간전쟁의 원인 제공자이며 미국에서 전쟁의 빌미를 제공한 당사자들이다. 미국에도 알카에다와 탈레반의 공조는 다시 9·11테러 같은 미국 본토를 공격할 수 있다는 공포를 준다. 이 때문에 막판까지 과연 탈레반이 알카에다를 버릴 수 있을지가 초미의 관심사였다. 그러나 탈레반은 과감하게 알카에다와 손절한다는 선언을 했고 이는 탈레반이 국제사회에 합법적인 정부로 인정받고자 엄청난 결단을 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지난 9월 22일 탈레반 과도정부는 새 내각 명단을 발표한 뒤 첫 공식 외교회담을 가졌다. 이 회담은 러시아, 중국, 파키스탄 특사와 탈레반 과도정부 간에 열렸으며 국제사회로부터 합법 정부를 인정받으려는 탈레반 과도정부의 요청으로 이뤄졌다. 러시아는 아프간 문제 담당 대통령 특사인 자미르 카불로프 러시아 외무부 제2아주국 국장을, 중국은 웨샤오융 특사, 파키스탄은 모하메드 사디크 칸 특사를 이 회담에 파견했다. 탈레반은 자신들이 국가로 인정받기 위한 모든 국제적 요구를 충족했다며, 아프간 정부를 공식적으로 인정해달라는 내용을 전달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들 중 중국과 러시아는 탈레반의 합법 정부 인정을 긍정적으로 보는 국가들이므로 향후 유엔 안보리에서 탈레반 입장을 피력해줄 수도 있는, 이른바 탈레반의 아군 역할을 할 수도 있다.

앞서 지난 9월 14일, 아미르 칸 무타키 탈레반 외교부장관은 기자회견을 열고 “아프간은 전쟁으로 피해를 본 국가이며 교육, 보건, 개발 분야에서 국제적 지원이 필요하다”며 인도주의적 지원을 호소했다. 무타키 장관은 “국제사회는 아프간 지원을 정치적으로 접근해서는 안 된다”며 인도주의적 판단을 국제사회가 먼저 고려해 적극 지원해달라고 요청했다. 아이러니하게도 과거 아프간 정부도 서방세계를 향해 이 같은 요청을 계속해왔다. 그 결과 천문학적인 원조금이 아프가니스탄에 들어갔지만 이런 국제사회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원조금은 부정부패로 이어지는 악순환을 겪었다. 탈레반도 전 정부처럼 국제사회에 원조금을 요청했다. 국제사회는 이를 어떻게 판단하고 관계 설정을 할지 고민이 더 깊어질 수밖에 없다. 아프간 시민을 무시할 수 없지만, 그렇다고 탈레반이 원하는 대로 당장 합법 정부로 인정했다가는 과거와 같은 전철을 밟을 수도 있다. 탈레반 과도정부 출범 후 복잡하게 엮인 국제사회의 탈레반과의 ‘관계 설정’은 당분간 혼란 속에서 표류할 것으로 예상된다.

김영미 다큐엔드뉴스 코리아 대표기자

Copyright © 경향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