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릉 가린 아파트 죄?..'부수면 피해는 공무원이 책임지나'

진동영 기자 2021. 10. 2.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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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릉 가린다" 문화재청 공사중단 명령에
2개 단지 결국 공사중단..이달 중순 운명 결정
날벼락 맞은 수분양자들..1만명 길거리 나앉을 수도
경기도 김포시 풍무동 장릉과 인천 서구 검단신도시 신축 아파트 건설 현장의 모습. /연합뉴스
[서울경제]

“처음엔 ‘이러다 입주가 늦어지는 것 아니냐’는 반응 정도였는데 지금은 ‘정말 부술 수도 있겠다’ 하는 불안감이 퍼지고 있습니다. 문화재 지키려다 수 천 명이 길에 나앉을 판인데 우리는 누가 구제해 줍니까.”(검단신도시 A단지 입주예정자)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경기 김포 장릉의 경관을 해친다며 공사가 중단된 검단신도시 인근 아파트를 두고 갈등이 극으로 치닫고 있다. ‘문화재 보호’를 이유로 문화재청이 공사 중단을 명령하자 건설사의 위법을 지적하며 15만명이 넘는 시민들이 철거를 요구하고 나섰다. 이미 분양을 마치고 골조 공사까지 끝낸 상황이다 보니 입주를 기다리는 주민 수 천 명은 발등에 불이 떨어지게 됐다.

◇경관 가린 아파트 결국 ‘공사 중단’···철거 현실화되나

김포 장릉 경관을 침해했다는 이유로 공사중지 명령을 받은 인천 서구 검단신도시 내 아파트 3곳의 운명은 엇갈렸다. 2일 법원과 건설업계에 따르면, 서울행정법원 행정6부는 ‘대광로제비앙’(735가구, 대왕이엔씨)과 ‘예미지 트리플에듀’(1,249가구, 금성백조)에 대해 건설사가 낸 공사중단 명령 효력정지 가처분 신청을 기각했다. 지난달 초 문화재청이 사전 심의를 받지 않았다며 공사중지 명령을 내린 것을 일단 유효하다고 판단한 것이다.

재판부는 “신청인(건설사)들은 공사 중단으로 회복하기 어려운 손해가 발생할 것이라고 주장하지만, ‘회복하기 어려운 손해’라 함은 금전으로 보상할 수 없는 손해를 일컫는다”며 “공사 중단에 따른 손해는 금전으로 보상이 가능한 손해이고, 문화재청장에 대한 현상변경허가 신청 심의 결과에 따라 공사가 재개될 가능성도 상당하다”고 밝혔다. 이에 따라 해당 2개 단지는 지난달 30일부터 공사가 전격 중단됐다.

30일 오후 경기도 김포시 풍무동 장릉 전방에 인천 서구 검단신도시 신축 아파트 건설 현장 내 타워크레인이 멈춰 있다. /연합뉴스

반면 대방건설이 시공 중인 ‘노블랜드 에듀포레힐’(1,417가구)은 한 숨을 돌렸다. 서울행정법원 행정4부는 이 단지가 다른 2개 단지와 달리 일부 옥탑 부분만 경관을 침해한다는 점을 감안해서다.

이들 단지가 공사 중단 위기에 놓인 것은 문화재청 허가 절차를 어기고 아파트를 지어 올린 탓이다. 문화재청은 대방건설·대광이엔씨·금성백조 등 3사가 문화재 역사문화환경 보존지역 반경 500m 내에 최고 25층 규모의 아파트를 지으면서 사전 심의를 받지 않았다며 이들을 문화재보호법 위반 혐의로 고발했다. 문화재청에 따르면 허가 절차를 어기고 왕릉 근처에서 건축물을 지은 건 이번이 첫 사례다.

문화재보호법을 엄격히 해석하면 이들 단지는 모두 공사 중지 또는 원상복구를 해야 한다. 이미 골조 공사를 마치고 내부 마감 중인 상황에서 최악의 경우 애써 지어올린 건물을 무너뜨려야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미 쌓아올린 아파트를 그렇게 쉽게 무너뜨릴 수 있겠냐 싶지만 상황은 녹록치 않다. 일단 이번 사태를 건설사들의 무리한 이익 추구 때문이라고 본 시민들이 청와대 국민청원을 통해 ‘철거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에는 ‘김포장릉 인근에 문화재청 허가 없이 올라간 아파트의 철거를 촉구합니다’라는 글에 1일 오후 현재 15만 5,600여명이 참여했다. 청원인은 글에서 “봉분 앞 언덕에서 계양산쪽을 바라보면 아파트들이 빼곡하게 들어와 조경을 심하게 해친다”며 “세계문화유산으로서의 가치를 훼손하는데다 심의 없이 위법하게 지어졌으니 철거돼야 하는 게 맞다. 아파트를 그대로 놔두면 나쁜 선례로 남아 같은 일이 계속 발생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에 올라온 아파트 철거 청원글. 현재 15만명 이상이 참여한 상태다.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 캡처.

◇입주예정자 피해 심각···건설사-문화재청은 ‘책임 떠넘기기’ 급급

건물을 부수는 것도 쉽지 않은 문제다. 가장 큰 문제는 당장 내년 6월부터 입주해야 할 입주민들의 사정이다. 문화재 관련 문제를 전혀 인식하지 못한 상태에서 분양을 받아 입주 계획을 세워놓은 이들이 심각한 피해를 겪을 수 있다. 3개 단지의 가구를 합치면 3,401가구에 달한다. 동거 가족까지 감안하면 이번 사태로 1만명 이상의 시민들이 한순간에 길거리로 나앉아야 할 수 있다는 것이다.

단지별 주민들은 초비상이 걸렸다. 입주예정자들은 온라인에 마련된 카페와 단체 채팅방 등을 통해 대책 마련에 분주한 상황이다. 일부 주민들은 “건설사가 이렇게 될 것이란 점을 충분히 예견할 수 있었을 것”이라며 건설사가 책임져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한 입주예정자는 “내년 입주에 맞춰 자녀가 인근 학교에 다닐 수 있도록 근처에 단기 임대 집을 마련해놓은 상황”이라며 “비싼 월세를 내면서 마냥 기다리고 있을 수도 없고, 이제 와 다른 집을 구할 방법도 없다”고 하소연했다.

이런 상황에서도 건설사와 지자체, 문화재청 모두 책임 떠넘기기에 급급한 상황이다. 건설사들은 인천도시공사에서 아파트 용지를 산 후 택지개발에 대한 문화재 현상변경 허가를 받았고, 인허가권자인 인천 서구청의 경관 심의도 받은 만큼 억울하다는 입장이다. 반면 문화재청은 당시 현상변경허가 신청 당시 설계도, 입면도 등 필수사항이 포함돼 있지 않았다며 건설사 책임이라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이 과정에서 인천 서구청 등 지자체의 관리 소홀 문제도 지적되고 있다.

한 입주예정자 커뮤니티에 올라온 시공사 측 설명 게시글.

이 아파트들의 운명은 이달 중순 이후 결정될 전망이다. 문화재청은 10월 11일까지 각 건설사에게 ‘역사문화환경 개선 대책’을 제출하도록 했다. 문화재위원회가 대책을 심의한 뒤 향후 처분을 결정할 예정이다. 건설사의 한 관계자는 “문화재 심의 통과를 위해 제출할 방안을 준비하고 있고, 현재 ‘최악의 상황’까지는 아니라고 보고 있다”며 “현장이 계획보다 공정이 많이 진행돼 심의 및 소송을 진행할 수 있는 여유가 있는 만큼 입주예정자들은 차분하게 진행 결과를 기다려 주길 바란다”고 했다. 건설업계의 한 전문가는 “입주예정자들의 심각한 피해가 우려되는 만큼 건물 철거와 같은 극단적인 방법을 동원하긴 어려울 것”이라면서도 “다만 나쁜 선례를 남길 수 있는 만큼 재발방지책에 방점을 두고 고민해야 한다”고 말했다.

진동영 기자 jin@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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