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학하지 마라, 인류는 진보했고 더 좋아질 거다"

양지호 기자 2021. 10. 2. 0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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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다시 계몽

스티븐 핑커 지음|김한영 옮김|사이언스북스|864쪽|5만원

‘자학(自虐) 사관을 버려라. 인류는 진보했고, 앞으로 인류의 삶은 더 개선될 것이다.’

스티븐 핑커(67) 하버드대 교수가 낸 새 벽돌책 ‘지금 다시 계몽’이 전달하고자 하는 바는 간단하게 요약된다. 전작 ‘우리 본성의 선한 천사’(2012)에서 인류사를 통틀어 폭력은 시간이 지날수록 감소했음을 밝혔다. 그는 이번에는 기대수명, 건강, 행복, 인권 등 모든 면에서 인류의 삶이 이전보다 나아졌고, 앞으로 더 나아질 것이라 주장한다. 데이터로 승부한다. 인류의 삶이 진보했음을 보여주는 표·그래프만 75개에 달한다.

그는 진보를 이렇게 정의한다. “죽음보다 삶이 더 낫고, 병보다 건강이 더 낫고, 궁핍보다 풍요가 더 낫고, 압제보다 자유가 더 낫고, 고통보다 행복이 더 낫고, 미신과 무지보다 지식이 낫다.” 기대 수명은 18세기 중반 35세에서 2015년 71.4세로 늘었고, 유아 사망률은 지난 70년 사이 100분의 1로 떨어졌다. 지난 200년 사이 세계 인구 중 극빈자 비율은 90%에서 10%로 떨어졌다. 전쟁은 줄었고, 민주주의는 확대됐다. 북한이라는 예외도 있지만 세계 전체적으로 인권 침해도 줄어들고 있다. ‘세계 가치 조사’에서 응답자 86%는 ‘행복한 편’이거나 ‘매우 행복’이라고 답했다. 저자는 이 같은 자료를 들이밀며 ‘인류는 진보했다’고 한다.

세계가 불평등과 기후변화로 신음하는데 무슨 한가한 소리냐고? 핑커는 불평등 심화를 부정한다. 세계 각국 지니 계수를 따져 통계 분석을 해보면 불평등은 1970년대 가장 심화됐고 이후 완화되고 있다는 것이다. 이어 그는 불평등과 빈곤을 혼동하지 말라고 한다. “불평등이 아니라 빈곤을 반대해야 한다. 모두가 똑같이 가져야 하는 것이 아니라 각자가 충분히 가지면 된다. 오늘날 빈곤선 아래의 미국 가정은 95% 이상이 전기, 수도, 수세식 화장실, 냉장고, 가스레인지, 컬러 텔레비전을 갖고 있다. 150년 전에는 로스차일드 가문 사람들도 이런 것들을 가지지 못했다.”

피케티는 “1910년이나 2010년이나 인구의 가난한 절반은 전체 부의 5%만 소유하고 있다”고 했다. 핑커는 “부의 총량은 1910년보다 훨씬 크기 때문에 같은 비율의 부를 소유하고 있다면 더 부유해진 것이지 예전만큼 가난한 것이 아니다”라고 했다.

지구에 불이 붙었다는데, 기후 위기는 괜찮은 것인가. 그는 “기술 발달, 규제 입법, 국제 조약 등을 통해 해결할 수 있다”며 낙관적인 전망을 내놓는다. 탄소 배출을 줄이기 위해 보다 안전한 핵 발전이 필요하다는 주장도 덧붙인다. 그는 오히려 종교적 면을 지닌 극단적인 ‘생태주의’를 우려한다. “이들 일부는 인간을 해충이나 병원균에 비유한다. 인간을 혐오하는 염세적 태도다.”

프랑스 계몽주의 철학자 드니 디드로가 낸 백과전서의 표지 그림. 과학과 이성을 통해 진리에 다가갈 수 있다는 계몽주의의 이상을 표현했다. /게티이미지코리아

‘팩트풀니스’와 ‘우리 본성의 선한 천사’를 읽은 독자라면 낯익다는 생각이 들 때쯤 그는 한 발 더 나아간다. ‘이렇게 인류가 진보한 것은 계몽주의 덕분이고, 계몽주의라는 가치를 받아들일 때 인류의 삶이 더 나아질 것’이라는 것이다.

핑커는 계몽주의를 ‘이성’ ‘과학기술’ ‘휴머니즘’ ‘진보’에 대한 신뢰로 정의한다. 양차 대전을 거치면서 서구사회는 도구적 이성에 대한 회의에 빠졌다. 과학기술은 인류를 파멸시킬 AI를 개발하는 도구쯤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그러나 핑커는 계몽주의가 인류 발전을 추동했으며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고 강조한다.

물론 인류가 진보한다고 내 삶이 얼마나 나아질지는 불투명하다. 아프리카의 어떤 소년은 지금도 더러운 물을 마시다 수인성 전염병으로 목숨을 잃고 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저자는 거시적 관점과 데이터에 근거한 이성적 판단을 거듭 요구한다. “일화는 추이를 대신하지 못한다. 어떤 것이 오늘 나쁘다고 해서 그것이 과거에 좋았다는 뜻은 아니다. 비관주의와 심오함을 혼동하지 마라. 문제는 피할 수 없지만 또한 해결할 수 있다.”

인류는 ‘우상향’ 해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는 희망을 통계로 제시한다. 감성에 의존하지 않고 이성적(理性的)으로 설득한다. 그래서 더욱 설득력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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