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에서] 불공정 게임, 드라마뿐인가

유석재 문화부 차장 2021. 10. 2. 0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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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계에서 여러분 모두는 평등한 존재이며, 어떠한 차별도 없이 동등한 기회를 부여받아야 합니다.”

오징어게임의 한 장면

한국 드라마 최초로 세계 80여 나라에서 넷플릭스 1위를 차지한 ‘오징어 게임’ 6회에 등장하는 ‘관리자’의 대사다. 승자가 456억원을 독식하고 탈락자는 모두 죽게 되는 잔혹한 게임에서 주최 측은 게임이 ‘공정’하고 ‘평등’하게 진행된다는 것을 시종 강변한다. 일부 요원이 참가자 중 의사와 공모해 사망자의 장기를 팔아넘기다가 처형당하는데, ‘게임의 룰을 어기고 다음 게임이 무엇인지 미리 알려줬다’는 것이 죄목이었다. 심지어 ‘깍두기’를 정해 소외된 약자를 배려하는 듯한 자세를 취하기도 한다.

‘오징어 게임’의 스포일러가 들어 있는 이 글을 쓰게 된 것은, 이 드라마가 능력주의(meritocracy)에 대한 하나의 우화라는 생각이 들어서다. 능력주의란 ‘개인의 능력에 따라 사회적 지위와 권력이 주어지는 사회야말로 공정하고 평등하다’는 것이기 때문에 당장 눈앞에 보이는 반칙은 타도의 대상이 된다.

그러나 드라마를 끝까지 본 사람이라면 알 수 있다. 주최 측은 마치 프로레슬링의 심판처럼 공정한 척 연기를 하고 있지만, 게임의 내용은 공정이나 평등과는 거리가 멀다는 것을 말이다. 3단계 게임인 ‘줄다리기’는 완력이 좋은 사람이 유리한데, 참가 단계에서 이미 각자의 조건이 다르니 조직폭력배 ‘덕수’ 는 홈이 아닌 3루에서 출발한다고 할 수 있다. 4단계 ‘구슬치기’에서 서울대 출신 증권맨 ‘상우’는 사실상 게임을 졌지만 속임수를 써서 승리할 수 있었다. 번호 선택의 운(運)에 의존하는 5단계 ‘징검다리’ 게임에선 주인공 ‘기훈’이 고른 맨 뒷자리가 생존 확률이 높았다. 시험 대신 제비뽑기를 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더 큰 문제는 첫 게임부터 전체 게임의 룰을 모두 알고 있는 주최 측 참가자가 몰래 끼어 있었다는 것이다. 그는 숱한 사람들이 총에 맞아 죽는 1단계 게임에서도 평정심을 유지했고, 요령을 터득한 상태에서 3단계 게임도 자기 팀이 유리하도록 판을 이끌 수 있었다. 그가 게임에서 퇴장한 것은 스스로 원했을 때였는데, 이때조차 다른 사람들과는 달리 무사히 살아남았다.

능력주의에 대한 비판론자들은 ‘민주주의 사회의 새로운 엘리트 집단이 자신의 특권을 보존하기 위해 만든 이데올로기’라고 말한다. 겉으로 내세우는 평등과 공정 속에 이미 불평등과 불공정이 숨겨져 있고, 능력조차 발휘할 기회를 얻지 못한 젊은 세대가 ‘흙수저’를 자처하는 세상이 됐다는 것이다. 주최 측이 ‘너희들은 가붕개(가재·붕어·개구리)로 남아 있으라’고 속삭이면서 게임의 룰을 설계하고 이를 이용하는 사회는 결코 공정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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