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얼굴의 금융, 그들은 왜 富를 약탈하는가

권구성 2021. 10. 2. 0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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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산 활동의 자본공급 역할 벗어난 금융
수익으로 비금융산업 투자 나서기보다
자사 주식 환매 등 '돈벌이'에만 골몰
美 주식 시장서 연간 4000억 달러 수탈
부의 약탈 기계로 변한 '금융' 민낯 비판
금융전문가 니컬러스 색슨은 금융시장의 비대화가 자본의 순환을 방해하고 시장 전반의 부작용을 불러온다고 지적한다. 사진은 세계 금융의 중심지인 영국 ‘시티 오브 런던’의 모습. 연합뉴스
부의 흑역사/니컬러스 색슨/김진원 옮김/부키/2만2000원

아프리카의 대표적 빈국인 앙골라는 석유와 다이아몬드가 풍부한 자원 부국이다. 앙골라는 자원에서 분명 호황을 누리는 국가지만 경제적으로는 불황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이 지역의 석유 생산량이 아프리카에서 나이지리아에 이은 두 번째라는 점을 고려하면 선뜻 이해하기 어렵다.

금융전문가 니컬러스 색슨은 앙골라의 불황을 ‘자원의 저주’라는 역설적 개념으로 분석한다. 풍부한 천연자원이 경제 전반을 이끌기보다, 오히려 독이 돼 다른 산업의 성장을 저해한다는 것이다. 경제적 측면만 놓고 봤을 땐 자원이 없는 나라보다 더 가난해질 수 있다고 본다. 색슨은 이 같은 현상이 비단 자원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고 지적한다. 한 국가의 산업이 특정 분야로 쏠림 현상이 나타날 때 또 다른 종류의 자원의 저주에 시달릴 수 있다는 것이다.

국내에서 ‘오염된 우물’(2008), ‘보물섬’(2011) 등의 경제서적 저자로 알려진 색슨은 신간 ‘부의 흑역사’에서 금융의 비대화가 경제에 미치는 영향을 분석한다. 앙골라의 자원의 저주에 빗댄 이른바 ‘금융의 저주(finance curse)’다. 저자는 금융이 생산활동에 자본을 공급하는 본연의 역할에서 벗어나 부를 약탈하는 거대 기계로 바뀐 과정을 추적한다.

책은 금융이 비대화된 대표적 사례로 영국을 든다. 영국 런던의 ‘시티 오브 런던(City of London)’은 미국 뉴욕의 월스트리트와 함께 세계 최대 금융 중심지로 꼽힌다. 저자는 “영국의 경우 앙골라에 비해 경제활동이 다각적이지만, 곳곳에서 금융이 다른 경제 부문과 충돌을 일으켰다”며 “그 싸움에서 늘 금융이 승리하는 듯 보였다”고 분석한다. 그러면서 “이런 요소가 앙골라에서도, 영국에서도 ‘비석유’ 부문에 해를 끼친다”며 “우위를 차지하는 산업이 지나치게 번성하면 다른 산업을 옥죄게 된다”고 우려한다.
니컬러스 색슨/김진원 옮김/부키/2만2000원
시티 오브 런던이 영국 금융시장의 심장이라면, 여기서 뿜어져 나오는 유동성은 모세혈관까지 흐르지 못했다. 저자는 “영국 은행의 대부(貸付)는 고작 10%만이 금융 부문 이외 산업으로 들어간다”며 “영국 경제에서 비금융 부문에 대한 투자는 이탈리아에도 미치지 못하며, 주요 7개국(G7) 국가 중에서는 가장 낮다”고 꼬집는다. 이렇게 비대해진 영국의 금융 부문이 영국 경제에 끼치는 피해 비용은 무려 4조5000억파운드에 달한다는 분석이다.

금융의 순환이 원활하지 못한 결과, 영국에서 런던을 제외한 지역의 생산성은 지속적으로 떨어졌다. 이런 부진을 만회하기 위해 정부는 ‘금융규제 완화’라는 카드를 꺼내들지만, 이는 급격한 대출 증가를 야기했을 뿐이다. 저자는 “대출금은 어디에도 닻을 내리지 못했고, 애초 도움받아야 했던 실물경제나 사람과는 연결되지 못한 채 금융시장 내에서만 돌았다”며 “이는 시대의 변화나 보통 사람, 산업의 절박한 요구와는 별 상관 없었다”고 지적한다.

금융의 비대화는 개인과 기업, 산업 전반의 경제활동에 영향을 미친다. 기업은 사업을 통해 확보한 수익으로 다시 투자에 나서기보다 자사 주식을 환매하는 데 골몰한다. 그 결과 주식이 오르면 경영진의 스톡옵션 가치가 올랐지만, 투자로 이어지지 못했다. 석유회사가 석유를 판 돈으로 유전 굴착 장비를 사지 않고 주식시장에서 돈을 굴리게 된 것이다. 기름을 유전이 아닌 월스트리트에서 파게 된 꼴이다. 저자는 “이런 식으로 미국 주식시장에서 수탈하는 돈은 연간 평균 4000억달러 이상”이라며 “생산적인 경제에는 막대한 타격이 아닐 수 없다”고 비판한다.

문제는 기업이 제조보다 무역에 집중하면서 시장 전반의 악순환을 불러온다는 점이다. 기업의 투자 감소는 노동자의 수익 감소로 이어진다. 이는 노동자의 구매력을 감소시키고, 결과적으로 기업이 투자를 멀리하게 만든다. 더 나아가 부의 수탈이 불러온 불평등은 극렬한 분열과 불화를 낳는다.

저자는 금융의 비대화는 단순한 ‘제로섬 게임’이 아니라 장시간에 걸쳐 일어나는 ‘네거티브섬 게임’이라고 본다. 흔히 금융을 ‘황금알 낳는 거위’라고 착각하지만, 진실은 다른 부문을 밀어내고 있는 ‘둥지 속 뻐꾸기’라는 지적이다. 이런 현실을 두고 “시장이 제 기능을 다하도록 돕는 애덤 스미스의 ‘보이지 않는 손’을 독점권력이 무자비하게 휘두르는 ‘보이지 않는 주먹’과 맞바꿨다”고 표현한다.

저자는 금융의 비대화를 비판하면서도 무작정 적대시하지는 않는다. 다만 그것이 정상적인 범위에서 많은 사람이 경제 활동을 가능하게 하고, 아래에서부터 부를 창출할 수 있도록 유도해야 한다는 것이다. 저자는 “중요한 문제는 금융 자체가 아니라 ‘규모가 너무 큰 금융’”이라며 “권력이 강한 금융은 민주주의로 검증받지 않은 금융”이라고 지적한다. 그럴수록 ‘금융이 적절한 비용으로 유용한 서비스를 제공하는가’를 점검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좀더 구체적으로는 이른바 ‘똑똑한 자본 통제’를 대안으로 제시한다. 예전처럼 국경을 기준으로 자본을 통제하는 것이 아닌, 위험한 성격을 가진 세계의 거대 자금으로부터 개인과 사회를 보호하는 경제 체제가 필요하다고 역설한다. 그것은 조세회피처나 독점과 같은 시장의 부패에 맞서는 일이며, 비대한 금융이 경제에 해를 끼치고 있다면 마땅히 금융의 역할을 축소해야 한다고 본다. 더 나아가 이것은 좌파나 우파의 갈등을 넘어 금융의 저주를 지지하는 쪽과 금융을 제자리로 돌려놓으려는 쪽 사이의 과제라고 주장한다.

권구성 기자 ks@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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