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융의 탐욕 커질수록 경제는 골병 든다
니컬러스 색슨 지음
김진원 옮김
부키
미래를 대비해 저축하는 사람들에게 이자를 주고, 기업이 생산 활동에 필요한 자금을 융통해 주는 것이 금융 본연의 기능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언젠가부턴가 금융은 딴 데로 눈을 돌렸다. 거대화된 금융은 난수표 같은 복잡한 기법을 이용해 경제에서 부를 수탈하는 방향으로 옮아갔다. 금융화는 또한 회사 소유자들을 위한 이익 분출구를 활짝 열어 놓았다. 반면 우리 대다수가 삶을 살고 일을 하는 터전은 무너져 갔다.
『부의 흑역사』는 이런 논리에 입각해 ‘왜 그리고 어떻게 금융은 우리의 경제와 삶을 망치는 악당이 되었나’를 조목조목 파헤쳐 고발한 책이다. 이 책의 원제는 ‘금융의 저주(The Finance Curse)’다. 금융 부문은 비약적으로 성장하는데 오히려 그 때문에 전체 경제는 더 황폐해지는 역설을 일컫는 용어다. 금융 자체의 필요성은 인정하지만 문제는 ‘규모가 너무 큰’ 금융이고 ‘권력이 너무 강한’ 금융이며 민주주의로 검증받지 않은 ‘빗나간’ 금융이다. 금융이 전통적인 역할인 실물투자로 이어지지 않는다면 실제로는 어떤 가치도 만들어 내지 않기 때문에 부의 수탈이라고 할 수 있다고 저자는 강조한다.
사회를 받드는 ‘하인’인 금융은 금융화를 통해 사회가 받드는 ‘상전’으로 거듭 태어났다.
이 책은 신자유주의를 배경으로 한 금융화가 세계 경제 그리고 각국 경제에 부정적으로 작용한 다양한 사례를 들고 있다.
지구촌 곳곳에서 흘러들어오는 검은돈을 연료로 삼아 시티오브런던의 유로마켓은 계속 몸집을 불려 나갔다. 조세 도피처로 유명한 케이먼제도 같은 영국령은 시티오브런던의 ‘환상의 짝궁’ 역할을 잘해냈다. 유로마켓과 천태만상 조세 도피처를 앞세워 전 지구상에 퍼진 대규모 규제 완화는 금융화 시대가 진정으로 시작했음을 알렸다.
때맞춰 미국에선 독점을 강력히 규제해 온 반트러스트법이 뿌리째 흔들렸다. 경쟁력 강화를 위해선 규제와 독점 금지가 완화돼야 한다는 ‘경쟁력 강령’ 주장이 먹혀들기 시작한 것이다. 은행은 물론 다양한 산업분야에서 대규모 기업 인수합병이 불붙었다. 초거대 금융회사들이 잇달아 탄생했으며 이는 탐욕스런 월스트리트가 결국 서브프라임모기지 사태를 견디지 못하고 세계금융위기를 부른 실마리가 됐다.
일반인들에게는 다소 생소할 수 있는 파생상품, 특수목적회사, 신탁, 사모투자, 민간 투자개발 사업 등 첨단 금융 기법들이 높은 수익성을 자랑하는 것은 수익만 뽑아 먹고 위험은 외부로 떠넘기고 있기 때문이다. 동전을 던져 ‘앞면이 나오면 내가 이기고 뒷면이 나오면 네가 진다’는 공식에 입각한 사기도박이나 다름없다는 것이다. 이렇게 외부로 떠넘긴 위험이 현실화한 것이 금융위기라는 분석이다.
‘경쟁력 강령’은 금융과 재정 쪽에서도 왜곡된 형태로 힘을 발휘했다. 각 국가가 머독이 요구한 것처럼 ‘사업에 개방’해야 하며 다국적 대기업과 은행, 세계 유동자금을 꾀기 위해 끊임없이 미끼를 흔들어야 한다는 논리다. 세금 감면과 금융규제 완화, 범죄 용인이라는 먹이를 주지 않으면 두바이나 싱가포르나 제네바같이 더 친절하고 경쟁력 높은 곳으로 몸을 뺄지 모른다는 두려움을 이용했다. 저자는 국가경쟁력이라는 미명 아래 약탈자들에게 앞다퉈 문을 열어 주는 길로 치달은 현상을 ‘제 살 깎아먹기 시합’이라고 비판했다. 거대 금융이 정치적으로도 힘을 휘둘러 자기 입맛에 맞게 법이나 규정이나 심지어 사회까지 바꾸어 놓은 사례도 많다.
세계 금융위기를 겪고 나서도 금융화와 금융의 저주는 여전하다. 금융은 과연 제자리로 돌아갈 수 있을까. 지금 한국에선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화천대유 공방이 벌어지고 있다. 정치와 권력이 금융과 교묘하게 뒤엉켜 엄청난 개발 수익을 챙겨 가는 희대의 사건을 보면서 ‘부의 흑역사’의 한 페이지를 떠올리는 이유는 뭘까.
한경환 기자 han.kyunghwa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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