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과문화] 탱고 속 자존심, 아르헨티나

- 2021. 10. 1. 22: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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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 탱고와 삶을 살아온 사람들
美·유럽 스타일은 '아류'로 여겨
독재정부의 '포클랜드 전쟁' 지지
축구에 대한 국민 자부심도 대단

아스토르 피아졸라 탄생 100주년 기념 공연 때의 일이다. 팬데믹 시대에 성사된 뜻 깊은 공연이, 하마터면 일정이 꼬여 성사되지 못할 뻔했다는 이야기를 여담으로 들었다. 아스토르 피아졸라 오중주단의 멤버들 가운데 두 명이 우리나라에서 지정한 백신의 종류와는 다른 백신을 접종하는 바람에, 일찍 내한해 2주간 자가 격리를 마쳤다는 것이다. 이들 아르헨티나 사람들이 접종한 스푸트니크 V는 우리나라에서 인정하는 백신 종류 중에 빠져 있다고 한다.

첫 공연이 끝난 다음날, 텔레비전과 라디오 방송용으로 이 오중주단을 인터뷰할 기회가 있어서 이 백신 이야기를 사석에서 슬쩍 멤버들에게 물어보았다. 아르헨티나 사람들은 왜 대한민국에 들어오지도 않은 스푸트니크 V 백신을 맞았냐는 질문에 이 사람들의 대답이 걸작이다. “우리는 유럽과 미국 사람들, 특히 영국이 만든 백신은 맞지 않는다”는 것이다. 문득 아르헨티나 사람들을 이해하거나 표현하기 딱 좋은 단어가 생각났다. 바로 ‘자존심’이다. 그리고 아르헨티나를 설명할 수 있는 것들도 함께 떠오른다. 탱고, 포클랜드전쟁, 그리고 축구다.
황우창 음악평론가
탱고의 명인을 다룬 ‘카페 데 로스 마에스트로스’ 또는 우리나라 제목 ‘부에노스 아이레스 탱고 카페’라는 다큐멘터리 영화를 보면, 후반부에 공연 시작 전 장내 아나운서의 안내가 나온다. “우리 아르헨티나 사람들은 유럽 사람들과 절대 말을 섞지 않는 것들이 있습니다. 하나는 축구이고, 또 하나는 탱고입니다. 신사 숙녀 여러분, 소개합니다….” 아르헨티나 사람들이 굳이 유럽 사람들과 탱고에 관해 논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탱고와 함께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저 정도 자부심을 가질 만하겠다는 생각이 든다. 항구 도시 뒷골목에서 태어나 아르헨티나 사람들의 삶을 지탱해 준 음악이, 유럽으로 건너가 사교계의 최신 유행 음악이 됐다는 사실 자체가 아르헨티나 사람들은 꽤나 못마땅했을 것이다. 지금도 이들은 유럽식 탱고, 일명 콘티넨털탱고를 정통 탱고의 아류쯤으로 생각한다고 한다.

자부심 가득한 탱고 이야기와는 달리, 제삼자의 입장에서 아르헨티나 축구가 유럽 사람들과 말을 섞지 않을 정도인지는 모르겠다. 아르헨티나가 월드컵에서 우승한 때는 마라도나가 현역으로 선수 생활을 하던 시절 딱 두 번 있었다. 유럽까지 갈 것 없이, 단 두 번이라는 아르헨티나의 우승 횟수는 앙숙 관계에 있는 브라질의 우승 횟수에도 턱없이 모자란다. 대신, 올해 브라질에서 열린 코파 아메리카 우승팀은 아르헨티나였다. 개최국이자 영원한 맞수 브라질을 이기고 우승컵을 들어 올렸다는 사실은, 어쩌면 월드컵 우승 횟수를 떠나 아르헨티나 사람들의 자존심을 한없이 세운 일이었다고 볼 수 있겠다.

아르헨티나 사람들은 자존심을 세울 수 있는 일이라면 설사 그 일이 옳은 것인지에 대한 고민도 없이 손을 들어주는 경우가 종종 있다. 대표적인 예가 바로 포클랜드전쟁에 대한 지지다. 1970년대 들어선 아르헨티나 군사 독재 정부가, 자신들의 행위에 정당성을 부여하기 위해 일으킨 전쟁이 바로 포클랜드전쟁이다. 현재까지도 영국령으로 남아있는 포클랜드 섬이지만, 아르헨티나 사람들은 원래부터 자신들의 땅으로 여기며 지금도 이 섬을 말비나스라는 이름으로 부른다. 아르헨티나 사람들은 이 ‘말비나스 전쟁’의 후유증으로 피폐해졌지만, 오히려 이들은 군사 독재 정부 시절 탄압받은 사실 자체를 망각한 채 전쟁을 일으킨 군사 정부를 지지했다. 아르헨티나 판 국토 수복 운동을 과감하게 실행에 옮기며 국가와 국민들의 자존심을 세웠기 때문이다.

이처럼 아르헨티나 사람들은 국민으로서 자존심을 세울 수 있는 경우라면 무조건 지지하기도 한다. 이 경력은 포클랜드전쟁 시절 이전이었던 페론 정권 때도 마찬가지다. 단지 차이가 있다면, 페론 정권 시절에는 권력을 유지하기 위한 수단으로 탱고를 장려했다면, 70년대 군사 정부는 탱고 연주자들을 비롯해 말 많은 문화계와 시끄러운 예술가들을 탄압했다는 사실이다.

황우창 음악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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