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늙으면' 비로소 보이는 것들 [책과 삶]
[경향신문]
내가 늙어버린 여름
이자벨 드 쿠르티브롱 지음·양영란 옮김
김영사 | 224쪽 | 1만4800원
어느 여름, 저자는 갑자기 늙어버렸다. 그는 미국의 대학에서 불문학과 여성문학을 가르친 학자이자, 자신의 이름을 딴 문학상이 MIT에서 제정되기도 한 작가 이자벨 드 쿠르티브롱이다.
젊은 시절 그는 문학작품을 탐독하며 삶의 자유를 찾았고, 가부장제의 부당함에 맞서 싸우는 페미니스트였고, 베트남전쟁 반대시위에 나가 경찰의 무기 앞에 꽃을 흔들었고, 반문화 운동의 물결에 몸을 맡긴 맨발의 히피였다. 젊음은 오로지 확신으로 가득했으며, 사고는 언제나 명료했다.
노인이 되어버린 그 여름, 모든 것이 안에서부터 무너진다. 저자는 여기저기서 사정없이 들이닥치는 늙음의 흔적을 직시해보기로 한다. “완전히 노인 질환”인 백내장이 생겼고, 치아는 “닳기까지 했”으며, 외출 전 거울 앞에서 점점 더 많은 시간을 보내야 한다. 책으로 채웠던 가방에는 이제 약봉투가 가득하다.
무엇보다 힘든 건 젊은 날 자신만만하게 택했던 삶의 방식에 의심이 들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자식을 낳지 않기로 한 선택을 후회하지는 않지만 출산·육아를 통해서만 느낄 수 있는 경험을 해보지 못했다는 생각에 허전해 한다. 쉽게 감상에 젖지 않는 성격이 자랑이었지만 새 세상을 건설하는 최전방에 있다는 기분을 느꼈던, 뜨거웠던 1960~1970년대의 추억은 예고 없이 고개를 든다. 젊음의 힘으로 가둬두었던 깊은 무의식은 우울증이라는 이름으로 저자를 공격한다.
“나이의 잔인한 공격” 앞에 곤혹스러운 저자는 문학작품에서 해방을 얻으려 했지만 “노화에 대한 글을 쓴 여성 작가들 자체가 아주 드문” 현실을 발견했다고 말한다. 덕분에 독자들은 늙음에 관한 저자의 솔직하고 유머 있는 고백서를 펼쳐볼 수 있게 됐다.
유경선 기자 lightsun@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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