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파리'의 안내로 떠나는 경성 여행..가장 을씨년스러운 곳은 어딜까 [그림책]

백승찬 기자 입력 2021. 10. 1. 21: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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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1930 경성 모던라이프
오숙진 글·그림
이야기나무 | 224쪽 | 2만5000원

일제 식민지 시기의 경성이라면 뜨거운 독립운동가, 고뇌하는 지식인, 악랄한 일본 경찰을 떠올리기 쉽지만, <1930 경성 모던라이프>에 그런 인물들은 등장하지 않는다. 이 책은 90년 뒤 서울 사람들과 별반 다르지 않은 허영, 욕망, 위선, 분노를 가졌던 당대 경성 사람들의 삶을 그려낸다. 화가인 저자는 당시 발간된 ‘별건곤’ 등 몇몇 잡지에 소개된 경성 이야기를 그림과 함께 엮었다. 소파 방정환의 단편 ‘사회풍자 은파리’에서 모티브를 얻은 금파리 캐릭터가 경성을 떠돌며 구경하고 안내한다.

남대문에서 내려다보면 솟아난 빌딩과 가로수로 단장한 경성의 모습이 상쾌하다. 종로 네거리 한복판에선 교통순사가 연신 신호를 낸다. 한 시골 어르신은 열흘 동안 당나귀 타고 상경해 경성 나들이에 나섰다. 다만 자동차 꽁무니에 매달려 오던 당나귀가 반대편 차와 부딪히는 사고를 겪자 살려내라고 아우성이다.

정동에는 미국, 러시아, 프랑스, 영국 등 외국 영사관이 밀집했다. 아침이면 새파란 눈의 아이들이 학교로 향하고, 오후엔 남녀가 쌍쌍이 테니스를 친다. 해 저물 녘 창문 밖으로 울려 퍼지는 피아노 소리도 빼놓을 수 없다.

금파리는 “우리 조선 사람들도 저렇게만 살았으면 싶구나” 생각한다.

광희문(光熙門) 밖 신당리로 나오니 분위기가 급변한다.

비료 썩는 냄새와 똥 냄새, 뿌연 먼지와 파리…. 가난한 사람들이 철 조각으로 지붕 잇고 살아가는 토막촌의 풍경이다. 그날 벌지 못하면 그대로 굶어야 하는 사람들이 이곳에 모여 산다.

팔각정에서 낮잠을 자던 룸펜은 “우리는 결코 개인의 나태함으로 낙오된 것이 아니다. 새로운 문명의 시대가 우리를 이렇게 밀어내는 것이다”라고 항변한다.

창경원에서 만난 남학생은 “처녀 뒤를 따라가며 입 좀 맞추자 덤벼드는 씩씩하고도 쓸모없는 어린 친구들”로 묘사된다. 미쓰코시 백화점에서는 향수는 아니 보고 예쁜 점원 얼굴에 값을 지불하는 신사를 목격한다. 종로 관수동의 중국인촌 아편굴에서 등잔을 사이에 두고 좌우로 누운 사람들은 굶주린 짐승이 고깃덩이 먹듯 탐욕스럽게 연기를 빨아댄다. 가장 을씨년스러운 곳은 독립문 종점의 서대문 형무소다. 경비가 삼엄해 가까이 갈 수조차 없어, 금파리는 멀찌감치서 감옥을 바라본다.

신문물과 구문물, 환락과 절망이 뒤섞인 경성의 풍경을 풍자적으로 그렸다.

백승찬 기자 myungworry@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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