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악 35km 걷고, 이제 대간 완주까지 단 한 걸음!
글·사진 김채울 @_whereismypizza 2021. 10. 1. 21:30
기부천사의 백두대간 일시 종주기 〈16〉 조침령~한계령~공룡능선~백담사
어린이재활병원 기부하는 28세 여성 마라토너, 홀로 백두대간 670km 종주 도전
어린이재활병원 기부하는 28세 여성 마라토너, 홀로 백두대간 670km 종주 도전
일시종주 42일차 : 조침령~한계령
오늘은 하루종일 로드워킹을 해야되니 부지런히 일어나 일찍부터 운행을 시작할 생각이었지만, 평소보다도 더 늦게 일어나 7시가 되어서야 정신을 차렸다. 확실히 텐트가 아닌 실내에서 잘 때는 마음 놓고 푹 자게 되는 것 같다. 푹 자서 컨디션은 정말 좋았지만, 눈 뜨자마자 창문 밖이 밝은 걸 확인하고 "아, 오늘도 더위와의 전쟁이겠구나" 싶었다.
오늘따라 유독 잠이 안 깨서 한참을 멍한 상태로 있다가 찬물로 세수를 하며 겨우 잠이 깬 뒤 오늘의 운행을 위해 준비한다. 이제 진부령 전까지 더 이상 민박을 찾을 일은 없을 거라, 어제 묵은 이 숙소가 내 백두대간 여행의 마지막 숙소가 될 것이라는 생각에 괜히 한 번 더 뒤돌아보며 숙소를 벗어났다.
7년 넘게 다니던 회사를 퇴사할 적에도 퇴사예정일이 가까워질 때마다 내가 하는 모든 것들이 다 이제 마지막으로 하는 것, 만나는 것, 느끼는 것이라는 생각에 사소한 것 하나하나에 다 의미부여를 하곤 했는데, 이번에도 그렇다. 백두대간이 끝나고 있음을 실감하고 있다.
8시가 넘어서야 도로 위에 발을 내딛는다. 이제 막 8시가 지났을 뿐인데 벌써부터 하늘에서 내리쬐는 태양은 뜨겁고, 아스팔트를 통해 올라오는 열기가 온 몸을 감싼다. 최근엔 계속 폭염특보가 내려진 상태에서 운행을 했다보니 이제는 나름의 감이 생겨 아침에 운행을 시작할 때 느껴지는 공기에 따라 오늘 더위가 어떨지 지레짐작된다.
그래도 다행인 건 시골마을을 구경하는 건 언제나 재밌다. 서울에서는 쉽게 볼 수 없는 정겨운 느낌이라던지, 아주 오래된 간판, 오래된 집을 구경하는 재미가 크다. 사소하지만 아름다운 모습들 덕분에 로드 워킹이 지루하지 않았다. 2시간에 한 번씩 쉬자는 생각을 갖고 길을 나섰지만, 생각보다 더 더워서 결국 2시간을 조금 못 채우고 송천떡마을 부근 버스정류장에서 20분정도 휴식시간을 가졌다. 후라이팬 위의 삼겹살은 이런 기분일까, 온 몸이 익어버릴 것만 같다.
출발지에서 약 11Km를 운행 후 한계령&양양 갈림길에 도착했다. 더위 탓인지 이미 체력이 많이 소모된 상태였는제, 진짜 시작은 지금부터라는 생각에 다시 한 번 의지를 다졌다. 서림삼거리에서 여기까지 오는데에는 오르내림이 크게 없었지만, 이제부터 한계령까지는 고도를 1,200m나 올라야한다. 산길이 아닌 차도일 뿐 산을 하나 오르는 셈이다. 게다가 바로 옆으로 쌩쌩 지나다니는 차량들로 오히려 공포감이 한 층 더 올라갔다.
이후부터는 정말 차들만 다니는 도로가 이어졌다. 새삼 내가 이런 길을 두 발로 걸어가고 있다는게 재미있었다. 차를 타고, 바이크를 타고, 자전거를 타고 이곳저곳을 누비더니 이제는 두발로 다니는구나 싶다. 평일이고 오전 시간이다보니 유동 차량이 많지는 않아 다행이었지만, 바로 옆에서 쌩쌩 달리는 자동차들은 꽤나 위협적이어서 긴장한 채로 도로 끝에 바짝 붙어서 걸었다.
오늘 걸어야 할 길 중 가장 걱정했던 구간인 남설악터널 앞에 도착했다. 터널을 지나야 한다니! 남설악터널은 780m 길이의 터널로, 한계령을 가려면 거쳐가야 하는 터널이다. 꽉 막힌 터널을 자동차가 아닌 도보로 이동하려고 하니 긴장되어 크게 심호흡을 한 뒤 터널 안으로 들어섰다. 터널 양쪽 끝에는 딱 한 명이 지나다닐 수 있는 좁은 길이 있는데, 그 길 따라 쭉 걸으면 되었다. 다만 차들이 바로 옆에서 너무 빨리 달려서 심장이 두근거린다. 더 무서운 건 소리다. 터널이라 차량들이 터널 안으로 들어올 때마다 소리가 증폭되어 들리는데, 상당히 무서웠다. 어릴 적 치과 치료 갔을 때 치료 자체보다 그 소리에 겁 먹게 되는, 그런 느낌이었다.
무사히 터널을 지나치고 계속 걷다보니 어느새 한계령이 17km밖에 남지 않았다는 표식이 보인다. 벌써 절반이나 왔다. 오늘 어디까지 가서 잠을 자야할지 고민해봤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오색에서 멈추기엔 내일 아침에 오색에서 한계령, 그리고 대청봉 지나 용대리까지 약 38km를 걸을 자신이 없다. 그래서 오늘은 어떻게든 한계령 근처까지 가서 쪽잠을 자겠다고 마음 먹었다.
무더위와 싸우며 계속 걸어가던 찰나, 관대문마을의 한 쉼터에 앉아 계신 어르신 한 분이 이 쪽으로 와보라고 부르신다. 그러곤 오이 좀 따다 줄테니 여기서 쉬고 있어보라고 하시며 뒷뜰에서 오이를 6개나 따다 주셨다. 오늘도 감사한 인연을 만났다는 것에 다시금 힘이 난다. 더 재미있는 건, 어르신이 나를 부르셨던 호칭이었다.
“아저씨! 이리 좀 와봐!”
아저씨는 아니었지만 도로 위에는 나밖에 없었기에 자연스레 나를 부르시는 것이라는 걸 알았다. 나중에 내 목소리를 듣고나서야 여자인 걸 알아차린 어르신께서는 “아이고 여자였네 남자인 줄 알았구만” 하시길래 “앗, 저 남자 맞아요” 하고 넉살스레 넘겼다. 무거운 베낭을 메고 이 폭염에 걷고 있는 내가 신기하신지 혹시 여군이냐고 물으신다. 어르신들과 짧은 대화도 하고 오이도 맛있게 먹으며 충분히 쉼을 가지고 에너지를 재충전했다.
묵묵히 걷다보니 어느새 오색마을, 그리고 편의점을 만났다. 아침부터 이 편의점만을 생각하며 걸었는데, 편의점에 도착하니 어찌나 반가웠는지 모른다. 어제에 이어 오늘도 트레일엔젤분들이 보내주셨던 기프티콘으로 얼음컵이랑 음료 등을 사서 더위를 식혔다. 확실히 휴가철이긴 한건지, 평일임에도 불구하고 오고 가는 차량들이 정말 많다. 백두대간할 때 사람들을 자주 못 마주치는데, 설악산은 초입부터 상당히 많은 사람들과 차량들을 마주치고 있어 역시 설악은 설악이구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한계령 이후부터는 오르막 경사가 심해졌다. 이미 20km가 넘는 아스팔트길을 걸어온 탓에 체력이 방전된 느낌이다. 오늘 어디서 자야 할지 고민되었는데, 한계령 근처에 정자가 있어 결국 이 곳에서 오늘의 운행을 마무리하기로 한다. 여기서 자게 될 경우 내일 아침 한계령까지 7km의 로드워킹을 해야되기에 부담스럽긴 한데, 그렇다고 올라가봤자 여기보다 더 좋은 박지가 있을지, 아니 잘 수 있는 곳이 있을지 확신도 없다. 그래서 내일은 로드워킹 7km를 포함해 등산 28km까지 총 35km를 걸어야 한다. 사실 약간 두렵다. 지리산의 공포가 떠오른다. 하지만 국립공원 구간이라 한 번에 돌파해야만 한다.
내일 새벽 1시에 출발해 입산가능시각인 3시에 바로 한계령에서 설악산 등산을 시작할 계획이다. 걱정된다. 설악산이 처음이라 걱정되고, 모든 사람들이 설악 구간이 힘들다고 하니 걱정되고, 그리고 35km라는 거리 자체도 걱정된다.
내일 무사히 잘 해내면 좋겠다.
일시종주 43일차 : 한계령~공룡능선~백담사
전날 7시쯤, 자려는 찰나 멧돼지 소리가 또 들리기 시작한다. 놀래서 소리 나는 쪽을 쳐다보니 계속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들리고, 이내 멧돼지가 움직이는 모습이 보인다. 여지껏 새끼 돼지만 보다가 처음으로 큰 멧돼지를 만났는데, 그 크기에 압도 당했다. ‘ASF 방지 철조망이 설치되어 있으니 넘어 오진 못 하겠지?’ 싶은 생각이 들면서도 바로 옆에서 계속 들리는 멧돼지 소리와 수풀을 헤집고 다니는 소리가 들리니 상당히 신경 쓰였다. 마지막까지 멧돼지들이 나를 놔주지않는다.
전날 일찍 잠들고 싶었지만 멧돼지 그리고 모기들의 습격으로 결국 잠은 거의 못 잤다. 침낭만 덮고 자려다가 모기가 너무 많아 결국 텐트를 쳤는데, 텐트를 치고도 한참을 잠이 안 와 못 잤다. 몇시간 전에 먹은 에너지드링크가 문제인건지, 아니면 내일이 너무 걱정되서 그러는건지. 그렇게 계속 잠을 못 잤고, 11시가 넘어서야 겨우 눈을 붙였다.
알람을 12시 20분에 맞춰뒀는데, 긴장한 탓인지 알람이 울리기도 전 12시에 눈이 떠졌다. 1시간밖에 잠을 자지 못 했지만, 오늘만 잘 해내면 내일은 그래도 거리도 길도 부담이 없다. 그리고 내일이면 드디어 백두대간 종주의 종지부를 찍는다. 아주 오랜만에 어둠 속에서 운행을 시작했다. 육십령~덕유산 구간 때 이후로 한 번도 새벽 산행을 한 적이 없으니 한 달도 더 되었다. 사실 어제 잠들 때까지는 무서울거란 생각이 전혀 없었는데, 막상 아무도 없는 새벽 1시에 설악산의 도로를 걷는다는 건 은근히 으슥한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다른 한 편으론 밤하늘의 별을 보며 걸을 수 있다는 사실이 좋았다.
이 시간에, 이 도로를 지나는 차량이 드문드문 있어 신기했다. “이 시간에 여길 지나간다고?” 무섭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다시 곰곰히 생각해보니 이 시간에 여길 걸어가고 있는 내가 그들 입장에선 더 무서운 존재일 것 같다. 불빛 하나 없는 도로를 운전해서 가고 있는데 어떤 사람이 혼자 커다란 배낭 메고 걸어가고 있다니, 내가 운전자라면 식겁할 듯 하다.
별이 쏟아질 듯 많았다. 중간중간 여러 번 별 보고 싶어서 랜턴 끄고 어둠 속에서 걸었는데, 밤하늘을 보며 끝없이 이어질 것만 같은 도로를 혼자 걸으니 괜스레 기분이 묘했다. 2시간의 도보 여행을 끝낸 뒤 드디어 한계령 휴게소에 도착했다. 한계령 휴게소에 도착하니 오색령 비석이 세워져 있다. 한계령인데 왜 오색령인가 싶어 찾아보니, 한계령이었다가 오색령으로 지명 개명되었다고 한다. 이 시간에 등산하는 사람이 나 말고 또 있을까 싶었는데, 놀랍게도 휴게소 도착하니 주차장에서 준비 중인 등산객들이 많다. 역시, 산 다니는 분들은 다 부지런하다.
한계령휴게소에 무사히 도착 후, 본격적인 오늘의 산행을 시작한다.
"후우우!"
대간길 시작 이래 가장 긴장되고 가장 걱정이 많은 시작이다. “잘 할 수 있겠지? 저녁 안에 내려올 수 있겠지?” 걱정이 별로 없는 편인데 이런저런 이유들로 유독 설악산 구간에 겁을 먹었다. 그렇게 걱정을 한가득 안고, 대청봉을 향해 무거운 발걸음을 내딛는다.
어둠 속에서 부지런히 걸어 오르다 한계령삼거리에 다다르니 붉게 물든 일출을 만났다. 와, 오묘한 색으로 물든 설악 능선에 감명을 받아 한참을 바라만 보고 있었다. 백두대간 종주를 끝내기 하루 전, 백두대간 완주 축하 선물을 받은 듯한 순간이었다. 날이 밝아올수록 붉은 하늘이 점차 연한 파스텔톤의 푸른 빛과 핑크 빛으로 물들었다. 종주가 끝나면 기념 타투를 어떤거로 할까 한 달 내내 고민했는데, 설악산 일출을 보자마자 이 순간을 담아야겠다고 다짐했다.
오전 6시, 운행 시작한지 5시간만에 컨디션이 급격히 떨어지기 시작한다. 잠을 제대로 못 자서 그런지, 졸리다. 비몽사몽한 채로 끝청봉에 도착하니, 들머리인 한계령에서부터 종종 마주치던 다른 팀 등산객분들이 휴식을 취하고 계신다. 그리고 같이 먹자고 하시며 빵과 과자, 복숭아 등의 먹거리를 나눠주신다. 오늘은 행동식이 넉넉치 않아 배고픔을 각오하고 운행을 시작했는데, 감사하게도 또 이렇게 구원의 손길을 받는다. 선생님들께서 어디서 왔냐고 물으시길래, 어제 오색 근처 정자에서 자고 새벽에 도로 따라 걸어올라와 출발했다고 하니 당황하신다. 내가 설악산을 수 십번을 와봤는데, 오색에서 한계령까지 도로 따라 걸어와 등산을 시작한 친구는 또 처음 본다고. 그러다 이내 대단하다고 하시며 오늘 하루 우리랑 같은 팀을 하자고 손을 내밀어 주신다.
이번이 생애 첫 설악산이기에 기대가 엄청 컸는데, 역시 설악산은 설악산이었다. 산 자체가 뿜어내는 웅장함이 남다르기도 하고, 탁 트인 조망이 많아 연신 감탄하며 경치 구경하느라 지루할 틈이 없다. 동행한 산과벗(사재붕) 선생님께서 말씀하시길 이렇게 맑고 잘 보이는 날은 1년에 몇 번 있을까말까하다고, 이렇게 맑은 날씨를 만난 것은 정말 운이 좋은거라고 알려주신다. 처음 와본 설악산을 가장 아름답고 맑은 날에 오다니! 설악산도 나의 백두대간 종주를 응원해주나 보다 싶어 괜스레 기분이 좋았다.
그리고 저 멀리, 금강산도 보였다. 언젠가, 내가 죽기 전에 통일이 되고 북한까지의 백두대간길도 모두 개방된다면 꼭 다시 한 번 대간길에 오를 것이다. 정말 궁금하다. 북한의 산은 어떤 모습을 하고 있는지.
끝청에서 조금 더 걷다보면 이내 중청대피소에 도착한다. 대청, 중청, 소청, 끝청 다 근접한 봉우리들이라 금방금방 이동할 수 있었는데, 중청은 군사기지라 등산객들의 출입이 불가하다고 한다. 그리고 이내, 설악산 최고봉 대청봉에 도착했다. 매번 사진으로만 보던 대청봉. 이게 진짜인가 싶기도 하고, 감격스럽기도 하며 복합적인 기분에 연신 정상석을 손으로 만져보곤 했다. 백두대간을 며칠 전에 시작한 것 같고, 지리산 천왕봉 정상석 앞에서 사진을 찍던 순간이 아직도 생생한데, 정신 차리고 보니 어느새 대청봉에 와있다.
대청봉에서 꽤 오랜 시간을 보냈다. 사진을 여러 번 찍기도 하고, 마루금 넘어 보이는 동해를 바라보기도 하고, 또 연신 정상석을 만져보고 하면서. 새벽부터 여러모로 많이 챙겨주시고 산에 대한 지식을 알려주셨던 홍천팀 선생님들과도 함께 사진을 찍었다. 처음에 찍어드리겠다고 하니, 오늘 우리는 한 팀인데 무슨 소리냐며, 채울이도 같이 찍어야한다고 정겹게 말씀해주셨다. 만약 오늘 선생님들을 만나뵙지 못 했다면 나는 정말 체력이 다 소진되어 중도 하산했을지도 모르겠다. 아니, 중도 하산할 힘이 남아있지 않았을 것 같다. 마의 설악산 구간을 무사히 끝낸 건 온전히, 홍천팀 선생님들 덕분이라고 생각한다. 이 자리를 빌어 당시 큰 힘이 되어주신 홍천팀 선생님들께 깊은 감사의 인사를 드리고 싶다.
대청봉을 오른 뒤 다시 갈림길로 돌아와 희운각대피소 방면으로 향했다. 그 무섭다는, 그 유명한 공룡능선을 위해! 소청봉에서 희운각 대피소까지는 2.1km의 거리밖에 안 되지만, 계속 이어지는 급경사의 내리막이라 정말 힘들었다. 무릎이 울부짖는 소리가 들릴 정도였다. 끝이 안 보이는 돌계단을 보며, 백두대간 남진을 하면 이 구간은 정말 힘들겠구나 싶었다.
여러 번 쉬며 힘겹게 희운각 대피소에 도착했다. 희운각대피소가 이번 구간에서 유일하게 물을 보충할 수 있는 곳이라기에 여기서 물을 보충할 계획이었는데, 아침에 생각보다 바람도 잘 불고 시원해서 물을 거의 안 마신 탓에 식수 여유가 있어 따로 추가 보충은 하지 않았다. 대피소에 도착하니 피곤하고, 덥고, 졸리기까지 3콤보로 움직일 힘이 들지 않았다. 아무래도 더 쉬어야될 것 같다는 생각에, 선생님들께 저는 조금 더 쉬고 가겠다고 말씀드리고, 30분정도 푹 쉬고 다시 운행을 이어갔다.
공룡능선에 들어서기 전, 무서운 안내문구가 내 앞을 가로막는다. 무리한 산행을 하지 말고, 단독 산행을 하지 말고, 폭염에는 산행을 하지 말라고 하는데, 우연찮게 나는 지금 3개 모두 해당된다. 공룡능선 구간은 희운각대피소에서 마등령갈림길까지 5.1km인데, 워낙 길이 험하고 고저차가 있어 보통 평균 3시간 반, 오래 걸리면 4시간 반정도를 잡는다고 한다. 나는 5시간 안에만 가보자는 생각에 발걸음을 내딛었다.
시작부터 아름다운 경치가 나를 맞이해준다. “와, 이래서 다들 공룡능선, 공룡능선하는구나!” 오늘 새벽에 만난 설악의 일출도 정말 감동적이었는데, 공룡능선 역시 그와 버금가는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었다. 우리나라에 이런 멋진 산이 있다는 것은 정말 큰 축복이자 행운인 듯 하다. 이제서야 설악산을 처음 와봤다는 것에 반성을 하게 될 정도로, 아름다움 그 자체였다.
계속 이어지는 비경에 감탄을 하며 걸어감과 동시에, 갈수록 체력이 떨어져 페이스가 점점 더 늦어진다. 계속 오르내리는 구간인데다가 대부분 암릉 구간이다보니 체력 소모가 크고, 새벽 1시부터 운행을 시작한 탓인지 졸립기까지 해서 정신을 못 차리며 무거운 한 걸음 한 걸음을 내딛었다.
공룡능선의 중간 지점이라고 하는 1275봉에 도착하고, 낮잠을 자야겠다 싶어 배낭을 내려놓았다. 계속 쉬고 싶다는 생각뿐이었는데, 1275봉에 놓여져 있는 벤치가 어찌나 반갑던지, 사막의 오아시스를 만난 기분이었다. 10분만 자야지 싶었는데 벤치에 눕자마자 바로 곯아떨어져 30분을 푹 자버렸다. 분명 잠깐 눈을 감았다 뜬 것 같은데, 30분이 지나있었다. 다행인 건 잠깐 자고 일어나니 컨디션이 많이 좋아졌다. 비몽사몽하며 걸어가고 있었는데, 낮잠 자고 일어나니 졸음도 더위도 한결 가셨다.
1275봉 이후부터는 느리지만 조금씩 걷고 쉬고를 반복하다 끝내 마등령 삼거리에 도착했다. 마등령 삼거리에서 백담사 용대리까지는 길이 쉬운 줄 알았는데, 에너지가 다 소진되어 그런지 정말 힘겹게 힘겹게 내려왔다. 어찌나 힘들었는지, 사진 찍는 걸 좋아하는 내가 사진을 거의 못 찍었다. 3시간이 걸려 마지막 힘까지 쥐어짜내며 무사히 하산할 수 있었다. 수 십번을 쉬어가며, 할 수 있다고 외치며, 조금만 더 힘을 내면 된다고 다독이며 말이다. 하산하자마자 바로 쓰러져자고 싶다는 생각을 했는데, 참새가 방앗간 지나칠 수 없듯이 설악산 입구에서 만난 편의점을 그냥 지나칠 수 없었다. 편의점에서 시원한 맥주 한 캔을 들이킨 후, 편의점 사장님께서 알려주신 박지에서 텐트를 치고 바로 잠들었다. 백두대간 마지막 날 밤이니 나름의 소소한 파티를 벌이자는 생각을 했는데, 파티는 무슨, 바로 곯아떨어져버렸다.
설악산은 역시 설악산이었다. 정말 힘들었고, 정말 길었다. 오늘은 내 자신이 자랑스럽다.
- Copyright ⓒ 조선일보 & Chosun.com -
Copyright © 월간산.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