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오리, 홍로, 부사 말고 다른 사과는 없나요? [밭]

이재덕 기자 2021. 10. 1. 18: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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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국광’, ‘홍옥’, ‘골덴’···. 40년 전만 해도 농가에서 많이 키우던 사과였다. 대부분의 과수원이 국광을 키웠고, 새빨갛고 새콤한 홍옥도 많이 재배했다. 골덴(골든 델리셔스)은 특이하게도 노란색 사과였다. 하지만 저장이 어렵다거나, 낙과가 많다거나, 병충해에 약하다는 이유로 많은 농가들이 ‘부사(후지)’를 재배하기 시작했다. 1980년~90년대 초까지 추석 사과의 대표는 부사였다. 하지만 부사는 본디 10월 말에 결실을 맺는 만생종 사과다. 농민들은 부사를 대목인 추석에 내보내기 위해 다 익지 않은 사과에 색을 내는 데 상당한 공을 들였다. 9월 초 이른 추석이 올 때는 부사를 내보낼 수 없어 여름 사과인 ‘아오리(쓰가루)’로 대신하는 농가도 있었다. 모두 일본 품종이다. 추석 사과 판도가 바뀐 건 농촌진흥청에서 1988년 첫 국산 사과 품종인 ‘홍로’를 개발하면서였다. 홍로는 달콤하고 과즙이 많다. 조직이 단단하고 푸석하지 않아 맛이 있다. 무엇보다 9월 수확이 가능한 품종이다. 부사 일색인 시장에서 홍로가 추석 대표 사과가 됐다. 2020년 기준, 국내 사과 재배 면적의 80% 이상을 아오리(4.1%)와 홍로(16.3%), 부사(61%)가 차지한다.

농촌진흥청 국립원예특작과학원 사과연구소에서 29년간 국산 사과 품종을 개발해 온 권순일 농업연구관. 농진청에서 개발한 36개 사과 품종 가운데, 그가 담당 육종자로 참여한 품종이 27종에 이른다. | 권순일 연구관 제공

최근 세 품종이 지배하는 국내 사과 시장에 균열이 생기고 있다. 5~6년 전부터 농가에 보급된 새 품종 ‘아리수’가 추석 사과의 ‘강자’로 떠올랐기 때문이다. 달콤하기만 한 홍로와 달리, 아리수는 새콤달콤한 맛이 있다. 모양도 둥글고 매끈하다. 경북 영주에서 부사와 홍로 등을 재배하는 차기철 농부도 몇 년 전부터 아리수를 키우기 시작했다. 그는 올해 추석에 아리수를 홍로의 2배 가격으로 팔았다고 했다. “수익이 좋으면 그걸로 따라갈 수밖에 없잖아요? 홍로 재배 면적을 줄이고, 아리수를 좀 더 늘릴 거예요. 근데 지금은 아리수 묘목이 (사려는 사람이 많다보니) 달려가지고···.”

아리수를 개발한 사람은 농촌진흥청 국립원예특작과학원 사과연구소의 권순일 농업연구관(52)이다. 그는 농가에 홍로가 보급되기 시작한 1993년 농진청에 들어가 29년 동안 사과 품종 개발에 매달렸다. 농진청에서 개발한 36개 사과 품종 가운데, 그가 담당 육종자로 참여한 품종이 27종에 달한다. 새 품종 개발에는 15~20년이 걸린다. 아리수 개발은 그가 2년차 연구사였던 1994년 일본 사과 품종인 ‘양광’에, 역시 일본 품종인 ‘천추’를 교배하면서 시작됐다. 그렇게 나온 사과를 수차례 선별하고 다시 키워내 개체들을 선발한 게 2007년이다. 전국의 ‘도 농업기술원’에서 적응시험을 거친 뒤 2010년 최종 선발된 품종이 아리수다. 같은해 아오리를 대체할 여름 사과 ‘썸머킹’도 개발했다.

권순일 연구관이 사과 품종 ‘아리수’를 보이고 있다. | 권순일 연구관 제공

육종에 성공했다고 해도 끝이 아니다. 농민들에게 이를 보급하고 재배기술을 알려야 한다. 권 연구관은 “새 품종 도입 초기에 농민들과 상인들에게 소위 ‘잡사과’라는 낙인이 찍히게 되면, 아무리 좋은 사과 품종이라고 해도 결국 시장에서 퇴출된다”고 말했다. 그렇게 만들어진 국산 품종 중에 농민들의 선택을 받지 못해 도태된 사과가 한둘이 아니다. 때론 예상치 못한 시장 변화에 새 품종이 타격을 입기도 한다. 권 연구관이 2014년 육종한 ‘루비에스’라는 미니 사과는, 일본의 미니 사과 ‘알프스 오토메’보다 맛이 좋아 학교 급식 식재료로 많이 이용됐지만 최근 코로나19로 급식이 중단되면서 수요가 급감했다.

농가에서 많이 재배하는 부사나, 아오리는 수십 년 전에 개발됐기 때문에 일본에 로열티를 내지 않는다. 그럼에도 국산 품종을 개발해야 하는 이유는 뭘까. 권 연구관은 “기후 변화로 사과의 품질이 낮아지는 현상이 벌어지고 있고, 소비자들의 취향도 계속 바뀌고 있다. 농가 소득에도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변화에 맞춰 다양한 품종을 개발해야 한다”고 말했다. 농진청 연구원들이 고온기에도 품질이 좋은 사과, 늦봄 서리를 버틸 수 있는 사과, 저장성이 좋은 사과, 노동력이 덜 드는 사과 등의 개발에 나서는 건 이 때문이다.

권순일 농업연구관이 미니 사과 품종 ‘루비에스’를 수확하고 있다. | 권순일 연구관 제공

그는 “후지(부사)를 대신할 만생종 사과를 만들어내고 싶다”고 했다. 부사는 10월 말 수확해 저온 저장하면 다음해 8월까지 시장에 출하할 수 있다. 오랜 기간 저장해도 맛이 유지되기 때문에 매년 8월 제철인 파란 여름 사과가, 빨간 저장 부사에 밀려 제 값을 받지 못할 정도다. “후지(부사)가 저장성과 맛 때문에 많이 재배되고 있는데, 사실 색을 내거나 나무를 관리하는 부분에서는 재배하기 까다로운 품종이거든요. 그런 부분에 대한 단점을 보완하는 품종을 만들려고 하니 ‘허들’이 많이 높다는 생각은 듭니다. 쉽지 않을 것 같은데··· 대체할 수 있는 만생종을 개발해서 적어도 후지(부사)와 경쟁을 하는 정도로만 가도 아주 성공적일 것 같아요.” 권 연구관은 이어 “좀 더 큰 꿈을 꾼다면, 우리가 개발한 사과를 로열티를 받고 해외에 판매하는 것”이라고도 했다.

권순일 연구관은 농민소득 증대와 국산 사과 품종의 가능성을 높이는데 이바지한 공로로, 대산농촌재단이 수여하는 제30회 대산농촌상의 수상자로 선정됐다. 대산농촌상은 농업과 농촌의 가치를 높이고 지속가능한 사회발전에 이바지한 인사에게 주는 상으로, 올해는 권 연구관(농업공직 부문)과 함께 이도훈 괴산먹거리연대사회적협동조합 이사장(농촌발전 부문), 이백연 전 산들바다유기농업영농조합법인 이사(농업경영 부문)가 수상자로 선정됐다. 시상식은 오는 10월 27일 오후 3시 서울 종로구 교보생명빌딩 컨벤션홀에서 열린다.


글 이재덕 기자 duk@kyunghyang.com

도시가 정답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로컬에서 다른 삶을 살아 보려는 이들이 늘고 있습니다. 스타트업을 하거나, 가게를 내거나, 농사를 짓습니다. 서울을 떠나 지방에서 재택근무를 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버티컬 채널 ‘밭’(facebook.com/baht.local)은 로컬에서 어떤 삶이 가능한지를 탐구합니다. ‘서울 말고 로컬’ 연재로 나만의 밭을 일구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facebook.com/baht.local

이재덕 기자 duk@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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