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캐피탈과의 18년 여정을 끝낸 정태영 부회장.."눈은 항상 전진하는 앞을 보아라"

이승훈 2021. 10. 1. 17: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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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8년간 여러분이 각자의 분야 또는 지역에서 큰 헌신으로 일구어 온 영광을 저에게 나누어 주셔서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여러분이 앞으로 만들어갈 또다른 영광을 마치 저의 일인양 즐겁고 감사하게 바라보고 응원하겠습니다. 현대캐피탈이라는 한 지붕 밑에서 생각과 고민을 나누어 온 인연을 항상 귀중하게 생각하겠습니다."

지난 2003년 현대캐피탈을 맡아 지난 18년간 현대캐피탈을 이끌어 온 정태영 부회장이 지난달 30일 대표이사에서 물러났다. 그는 최근 자신의 페이스북 페이지에 현대캐피탈 직원들에게 이별의 인사를 전했다고 밝히기도 했다. 실제로 정 부회장은 지난달 27일 회사 인트라넷을 통해 지난 20여년간 현대캐피탈을 경영하면서 겪었던 여러가지 일들에 대한 소회를 밝힌 것으로 알려졌다.

정 부회장은 현대캐피탈을 대한민국 대표 자동차 금융사 반열에 올려놓은 혁신적인 최고경영자(CEO)로 알려져 있다. 실제로 그는 수 천억대의 적자로 인해 위기를 겪고 있던 현대캐피탈을 글로벌 수준의 경영기법과 아이디어로 완전한 흑자 기업으로 돌려놓은 것은 물론, 국내 뿐 아니라 해외 시장에도 진출해 현대캐피탈을 글로벌 금융사로 성장시켰다.

■GE 합작 통해 턴어라운드 발판 마련

정태영 부회장이 대표이사에 취임하던 해인 2003년, 현대캐피탈은 2500억원대 적자가 예상되는 상황이었다. 2004년이라고 상황이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당시 정 부회장은 현대캐피탈에 과감히 외국 자본인 미국의 GE(제너럴 일렉트릭)로부터 약 1조원 규모의 투자를 이끌어냈고, 2005년 마침내 흑자 전환에 성공했다. 지난해 현대캐피탈의 순익은 4000억원이 넘어섰다.

당시 GE는 현대캐피탈 투자를 위해 서울 하얏트호텔에 캠프를 차리고 많은 인원을 투입해 집중적인 협상을 벌였다. 현대 쪽 창구를 맡은 정 부회장은 GE캐피탈의 데이빗 닐슨 회장을 만나 서로의 입장과 철학을 공유했고, 이어 제프리 이멜트 GE 회장도 만나서 협상을 마무리지었다.

정태영 부회장은 "이멜트 회장이 현대캐피탈 투자에 대해 GE 역사상 경영권 인수 없이 투자하는 첫번째 사례라는 점을 강조했다"며 "두 시간 동안 이어진 그와의 면담을 신뢰감 있게 마무리한 것이 성공적인 결과를 이끌어내는 계기가 됐다"고 말했다.

합작 계약서에는 GE가 최고재무책임자(CFO)와 최고위기관리자(CRO) 등 중요보직에 다섯명의 인원을 파견하게 되어 있었다. 처음에는 이렇게 시작했지만 이후 정 부회장이 선진 금융기법을 빨리 받아들이기 위해 GE인원을 자꾸 더 요구해 나중에는 26명까지 늘었다.

정 부회장은 "GE로부터 이런 합작 파트너는 처음 본다. 대개는 우리 인원을 줄이려고 노력하는데 현대는 더 보내라고 난리를 친다. 우리 간섭이 귀찮지 않느냐. 이제는 GE도 더 보내려고 해도 보낼 사람이 없다는 얘기까지 들었다"며 "지금 생각하면 이런 태도 때문에 GE로부터 상당한 신뢰를 받았다고 생각한다"고 회고했다.

정 부회장은 재무적 투자를 받는데 그치지 않고 글로벌 레벨의 리스크 관리기법을 도입했다. 대표적인 사례가 당시만해도 한국에서는 도입하지 않았던 총부채상환비율(DTI)를 대출 심사 프로세스에 도입한 것이다. 이후 금융위기 당시 이 DTI가 큰 위력을 발휘했고 부실 비율이 낮았던 현대캐피탈은 성장을 지속할 수 있었다. 또한 투명한 의사결정 시스템과 HR, 조직 관리, 업무 프로세스 등 회사 전반에 글로벌 기업들의 개방적이면서도 능력을 중요시하는 기업문화를 도입하는 등 혁신적인 경영 기법으로 현대캐피탈을 완전히 새로운 기업으로 탈바꿈 시켰다.

그 결과 현대캐피탈은 수입차 점유율 상승, 은행·카드사의 자동차금융 시장 진출 등 어려운 환경 속에서 엄청난 성장세를 보였다. 지난 2003년 8조7800억원이었던 현대캐피탈 국내 자산은 2020년 33조6800억원으로 늘었다. 또 지난 2003년 영업수익 1조2278억원, 영업이익 -2250억원에서 지난해 영업수익 3조2454억원, 영업이익 3862억원 수준으로 성장했다.

2003~2020년 현대캐피탈 국내 영업수익(매출)과 영업이익 추이 [자료 = 현대캐피탈]
■글로벌 진출 통한 자산 100조 시대 개척

정태영 부회장은 합작회사(JV) 방식으로 스페인 금융회사인 산탄데르(Santander) 등과 같은 세계적인 금융기업들과 손을 잡고 전세계 각국에 진출해 현대캐피탈을 명실상부한 글로벌 금융사로 변모시켰다. 중국법인(BHAF) 역시 중국의 북경기차와 설립한 합작회사다.

이처럼 현대캐피탈의 글로벌 비즈니스가 공격적이고 전략주도적으로 진행되는 데에는 정 부회장의 장기적인 안목을 바탕으로 이뤄진 현지 투자와 통합적 조직 시스템의 영향이 크다. 그는 "지난 18년간 GE 뿐 아니라 산탄데르 등의 세계적인 금융사와 순차적으로 손잡으며 그들의 금융기법을 도입해 캐피탈권은 물론 은행권을 뛰어넘는 일류 금융사가 되었다"며 "LA에서 런던까지, 상파울루에서 모스크바까지 글로벌 전 지역으로 확장했다"고 말했다.

실제로 현대캐피탈은 지난 2016년 비유럽 국가 금융사로서는 최초로 유럽중앙은행(ECB) 허가를 받아 현대캐피탈뱅크유럽(HCBE)를 설립하는 대규모 프로젝트를 이뤄냈다. 당시 '국내 금융사가 유럽 대륙에 은행을 설립하는 것은 무모하면서도 과도한 일이 아니냐'는 국내 금융업계의 시각이 있었지만 이를 통해 현재 현대캐피탈은 미래 사업을 준비하는 것은 물론, 유럽 전역이 현대캐피탈을 한국의 금융사가 아닌 글로벌 금융사로 인식하게 됐다.

정 부회장은 산탄데르와의 협상 과정에서 고(故) 에밀리오 보틴 회장과의 유쾌한 인연도 소개했다. 그는 "처음 보틴 회장을 스페인 마드리드에 있는 산탄데르 본사에서 만났는데 이 곳에 우거진 올리브 열매와 올리브 오일 이야기만 하다가 끝이 났다"며 "다음 번 만남에는 새로 거둔 올리브 열매를 주면서 반응을 지켜보기도 하는 등 매우 통찰력이 높고 유쾌하신 분"이라고 추억했다.

산탄데르와의 합작회사를 성공적으로 출범시킨 배경에 그는 효도와 신뢰를 꼽았다. 고령인 보틴 회장에게 늘 공경하는 마음으로 잘 대했는데, 이게 보틴 회장의 신뢰를 얻는데 도움이 됐다는 것이다. 정 부회장은 "독일 뉘른베르크에서 열린 산탄데르 임원들의 파티에 초청을 받았는데 보틴 회장이 옆자리에 앉으라고 하더니 수백명의 임원들에게 '이 사람을 주목해라, 내가 아주 좋아하는 사람이다, 같이 열심히 일해라'라고 선언까지 해줬다"고 말했다.

정 부회장의 신뢰를 높이기 위해 26시간을 날아 상파울루까지 간 일화도 소개했다. "하루는 보틴 회장이 갑자기 전화를 해서 '보고 싶은데 여기 한번 오지?'라고 했어요. 그래서 '바로 가겠다, 어디에 계시냐?'라고 물었더니 브라질 상파울루라고 하는 겁니다. 유럽인 줄 알았지 설마 브라질에서 전화할 거라고는 생각을 못했던 것이죠. 간다고 했으니 바로 준비해서 26시간을 날아서 상파울루까지 갔습니다. 거기서 산탄데르의 남미 전략을 들었고 그 결과 브라질에서 산탄데르와 합작회사를 만드는 계기가 됐습니다."

2003~2020년 현대캐피탈 국내와 해외 자산 추이 [자료 = 현대캐피탈]
이러한 해외사업의 성공으로 현대캐피탈은 지난해 전세계 12국에서의 비즈니스를 통해 전세계 자산 100조원 시대를 열다. 자동차금융을 바탕으로 한 새로운 비즈니스에도 투자를 확대해 유럽의 대표 리스사인 식스트리싱을 인수하는 등 글로벌 시장에서 현대캐피탈의 영향력을 강화했다.

정 부회장은 최근 직원들에 보낸 마지막 인사를 통해 지난 20여년간 현대캐피탈에서 직원들과 함께 일궈온 이와 같은 성과에 대해 고마움을 표현했다. 그는 "이런 자랑스러운 회사의 뒷모습을 보며 저의 여정을 마칠 수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한다"면서 "부디 건강하시고 앞으로도 현대캐피탈을 끊임없이 발전시켜 주시고 현대캐피탈 안에서 본인의 큰 성취를 이루시길 바란다"고 말했다.

특히 현대캐피탈의 리더들에게 그는 "튼튼한 발판을 만들고 그 발판이 회사를 지탱하는 발판이도록 해야지 회사의 발걸음을 묶는 발판이 되서는 안된다"며 "눈은 항상 전진하는 앞을 보아야 한다"고 당부했다. 그는 또 "승자는 경기장을 선택하고 룰을 만들어가는 사람이지 남이 만든 경기를 잘 하려고 애쓰는 사람이 아니다"라고 강조했다.

한편 정 부회장은 앞으로 현대카드와 현대커머셜 경영에 집중할 계획이다. 금융의 디지털 혁신에 관심이 많았던 정 부회장은 현대카드의 디지털 전환에 집중하는 것은 물론 현대커머셜의 성장에 총력을 기울일 계획이다.

[이승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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