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은 밤 공원 산책 중 술 취한 남성이 다가왔다..벽돌을 들어야 되나, 말아야 하나 [판결 돋보기]
[경향신문]
늦은 밤 공원을 산책하던 중 만취한 남성(한모씨·45)이 말을 걸며 다가왔다. 당황스럽고 무서웠다. 주위엔 아무도 없는데 이 사람은 점점 더 다가온다. 그 순간 땅에 놓여 있던 벽돌이 보였다. ‘들어야 할까, 말아야 할까.’
왜소한 체격의 중년 여성 오모씨(55)는 이 같은 고민을 하다가 취한 행동으로 재판을 받게 됐다. 지난 4월20일 서울중앙지법 형사22단독 방혜미 판사 심리로 열린 첫 공판기일. “피고인은 위험한 물건인 벽돌로 피해자를 때려 폭행했습니다.” 검사는 말했다. 오씨는 긴장한 목소리로 “때린 게 아니라 막으려고 한 것입니다”라고 했다.
사건이 벌어진 건 지난해 4월27일 밤 10시40분쯤이었다. 서울 강남구 개포동의 대진공원. 평소처럼 산책을 하던 오씨가 공원 안 정자 앞을 지날 때 낯선 남성이 술에 취해 다가왔다. 정자 부근은 어두웠다. 휴대폰 손전등을 켜고 빠르게 지나가려 했지만 남자가 더 빨랐다. “너무 무섭고 그 사람 손이 몸에 닿는 게 싫었습니다.” 오씨는 주변에 보이는 벽돌을 들었고, 손을 뻗어 그와의 거리를 벌렸다.
그 이후가 쟁점이다. 오씨는 이 남성이 “때려 보라”며 벽돌을 향해 스스로 얼굴을 들이박았다고 했다. 이 남성은 다르게 말했다. “죽여버릴 거라며 머리를 여러 대 때렸고, 발로 정강이랑 대퇴부도 찼습니다.” 오씨의 신고를 받고 온 경찰은 오씨에게 특수폭행죄를 적용했다.
지난달 7일 증인신문이 열렸다. 증인으로 나온 ‘공원의 남성’ 한씨는 질문과 상관 없는 이야기를 늘어놓는 등 우왕좌왕 말했다. 그는 사건 당시 “평소보다 많은 막걸리를 마셨고, 공원 정자에서 휴대폰을 하고 있었는데, 오씨가 일행과 정자 인근 벤치에서 ‘남자 얘기’를 하고 있기에‘주위에 아이들도 있는데 나잇값 좀 하라’고 말했다”고 했다. 그런데 오씨가 갑자기 욕설을 하며 벽돌로 자신을 때렸다는 것이다. 한씨는 경찰에선 “정자에 앉아 있는데 생전 처음 보던 사람이 벽돌을 가져와 제 머리를 때리고 욕을 하고 죽인다고 했다”고 했다.
한씨 진술은 증거조사를 위해 재생한 폐쇄회로(CC)TV 영상과 차이가 있었다. 오씨는 그날 혼자였고, 주위엔 아무도 없었다. 담배를 피우는 한씨 모습이나, 오씨가 혼자 공원을 거닐거나 휴대폰 조명을 켠 뒤 통화하는 모습만 잡혔다. 벽돌을 들고 막아선 장면은 카메라의 사각지대에서 있어 포착되지 않았다.
증인신문을 마친 뒤 검찰은 오씨에 대해 벌금 100만원을 선고해달라고 했다. 오씨는 “한씨가 진술한 내용이 나에 대한 게 아닌 것 같다”며 혼란스러워 했다. 밝은 곳에서 처음 한씨를 본 오씨는 법정을 나와서도 긴장된 듯 목소리가 떨렸다.
방 판사는 지난달 30일 오씨에 대해 무죄를 선고했다. 우선 오씨가 한씨를 벽돌로 폭행했다는 공소사실 자체가 입증되지 않았다고 했다. 한씨의 일관되지 않은 진술보다는 한씨를 막기 위해 벽돌을 들었을 뿐이라는 오씨 주장이 더 신뢰가 간다는 취지였다.
방 판사는 결과적으로 폭행이라 해도 인적이 드문 야간의 공원에서 자신의 생명과 신체를 보호하기 위해 한 방어행위는 정당방위로 볼 수 있다고 했다. 이 행위가 정당방위의 범위를 넘어섰다 할지라도 “(과잉방위가) 야간 기타 불안스러운 상태하에서 공포, 경악, 흥분 또는 당황으로 인한 때에는 벌하지 아니한다”는 형법 제21조3항에 따라 처벌할 수 없다고 했다.
선고기일에 법정에 오지 못한 오씨는 결과를 듣고 “정말 다행”이라며 마음을 쓸어 내렸다. 하지만 지난해 11월 정식재판을 청구한 지 1년 가까이 지난 뒤였다. 평범하게 하루를 마무리하던 동네공원이 오씨에겐 두렵고 껄끄러운 공간이 됐고, 그는 이 동네를 떠났다.
전현진 기자 jjin23@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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