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은 원래 셌다..당신이 못 봤을 뿐 [이진송의 아니 근데]
[경향신문]
소년만화를 좋아했다. 우정, 노력, 승리, 모험과 성장, 눈물과 콧물과 땀, 가슴이 뜨거워지는 경쟁…. 시들해진 것은 언젠가부터 그 세계에는 내 자리가 없다는 사실을 깨달은 뒤다. 순정만화의 풍부한 스펙트럼과 별개로, 여캐(여자 캐릭터)가 주인공인 서사는 전체적으로 봤을 때 턱없이 부족했다. 여캐는 주인공의 친구이거나, 첫사랑이거나, 매니저이거나, 동료였다. 때로는 높은 능력치를 자랑했지만 그래봐야 ‘여자’로 소비되었다. 기괴할 정도로 강조된 신체 굴곡이나 로맨스가 인물의 존재 이유였다. 실패도, 성장도, 극복도, 우정도 주인공인 소년의 것이었다. 여캐의 미래에 기다리는 것은 등장인물 중 한 명의 아내가 되어 앞치마를 입고 등장하는 경력단절 엔딩. 노인을 위한 나라만 없냐? 여캐를 위한 나라도 없다. 이런 좌절을 맛본 적 있다면, 다양한 욕망을 거침없이 드러내는 여성 캐릭터에 목말랐다면, 여성 간의 관계성과 성장 서사를 기다렸다면. 매주 화요일 오후 10시20분을 두근거리며 기다릴 것이다. “제 눈 똑바로 보세요.” Mnet의 여성 댄서 크루 서바이벌 프로그램, <스트릿 우먼 파이터>(이하 <스우파>) 할 시간입니다.
또 서바이벌 프로그램이다. 게다가 Mnet과 ‘여성 ○○○’? 언제나 불안하지만 흥행이 보장된, 속된 말로 ‘팝콘 터지는’ 조합이다. 연상 작용으로 악마의 편집, 자극적인 설정, 결과 조작 같은 단어들이 줄줄이 떠오르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업보니까. 스트릿 ‘우먼’ 파이터라는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여성 댄서들이 춤으로 싸운다. 화려한 커리어의 걸출한 여성 댄스 크루 여덟 팀이 출연한다. YGX(와이지엑스), LACHICA(라치카), WANT(원트), WAYB(웨이비), CocaNButter(코카앤버터), PROWDMON(프라우드먼), Holybang(홀리뱅), HOOK(훅)이 <스우파>의 주역이다. 이 중 크루 ‘웨이비’는 첫 번째 탈락자로 선정되어 프로그램에서 하차했다(노제를 돌려달라).
첫 방송을 기다리는 동안, 따끔거리는 눈을 비비며 소독차를 쫓아다니던 시절이 떠올랐다. 언제쯤 Mnet의 농간에서 벗어날 수 있담! 그런데 어쩔 수 없다. 부아아아앙. 압도적인 소리와 뿌연 연기처럼, <스우파>는 너무나 매혹적이다. <스우파>를 사랑하지 않는 방법을 아시나요? 아니요, 그런 방법은 없습니다. 주성치가 한국인이었다면 소림축구가 아니라 소림댄스를 찍었을 것이다. <스우파>의 인기는 시청률과 화제성을 가리지 않고 뜨겁다. 이 재미를 견인하는 것은 의심할 나위 없이 댄서들이다. 스트리트에서 다진 실력과 독보적인 캐릭터, 풍부한 관계성은 그간 여성들에게 허용되지 않았던 서사다. 각 영역에서 치열하고 뚜렷하게 존재하는 댄서들을 보며 깨닫는다. 이런 이야기는, 이런 여성은, 없었던 게 아니라 그저 잘 보이지 않았을 뿐이라고.
<스우파>를 보다 보면 불시에 얻어맞는 듯하다. 자신만만하고 거침없는 댄서들의 언행은 평생 여자는 겸손해야 하고, ‘나대면’ 안 되고, 공격적인 언행을 삼가야 한다고 들어 딱지 앉은 귀에 잽을 날린다. 자신이 이길 수 있을 것 같은 댄서를 지목하는 ‘약자 지목 배틀’에서 약자로 지목받은 와이지엑스의 리정은 상쾌하게 말한다. “내가 약자? 난 한 번도 약자였던 적이 없는데?”, 원트의 엠마는 “백 명이 있어도 나만 보이게 춤출 수 있다”고 자신한다. 코카앤버터의 제트썬은 남들 같은 방송 리액션은 기대하지 말라며, “우린 그딴 거 안 한다”고 단언한다. 본업에서 확고한 커리어를 쌓은 댄서들은 주눅 들거나 눈치 보지 않는다. 한껏 뽐내고, 즉각적으로 의견을 밝히며, 승부욕을 불태우며 달려든다. 짜릿하고 후련하다. 그런가 하면 의외의 매력으로 ‘능력 있는 여자 = 센 언니’라는 진부한 도식을 빠져나간다. 라치카의 가비는 메인 댄서에게 잘 보이겠다며 몰래 속눈썹 제품을 더 챙겨주는 엉뚱한 매력을 드러냈고, 훅의 아이키는 대놓고 상대를 견제하라고 깔아준 판에서 갑자기 동네 이름을 언급하며 분위기를 익살스럽게 바꾸어버렸다.
실력 갖춘 독보적 캐릭터에
허락되지 않던 여성 서사들
볼 때마다 ‘짜릿하고 후련’
여성은 겸손해야만 하나?
눈치 보지 않고 더 뽐내고
불타는 승부욕도 포인트
서로 뜨겁게 경쟁 하다가
상대에 존중도 잊지 않아
‘여적여 프레임’도 돌파
난 누군가의 배경이 아니다
각자 내 무대의 주인공이다
이토록 빛나는 이들이 함께 춤추는데, 관계성 이야기를 안 할 수 없다. 죽마고우, 백아절현, 도원결의, 관포지교, XX 친구… 우정은 전통적으로 언제나 남자의 것이었다. 여자의 우정은 이성애보다 급이 낮고, 결혼하면 무의미해지며, 사실은 질투와 이간질이 기본값이라는 편견은 낡았으나 공고하다. 앞으로는 그런 헛소리를 하는 사람에게 <스우파>를 틀어주자. 뜨거운 경쟁, 상대에 대한 존중과 애정이 넘친다. 작년에 Mnet에서 방영한 <굿걸>이 서로 다른 여성 출연자들이 처음 만나 우정을 쌓는 과정이었다면, <스우파>는 댄서들이 좁은 바닥에서 얽히고설키며 형성한 관계성을 드라마틱하게 조명한다. 오랫동안 한 팀이었다가 갈라선 홀리뱅의 허니제이와 코카앤버터의 리헤이는 배틀 후 끌어안는다. 사제관계였던 댄서가 함께 무대를 꾸리거나 날을 세우다가도 춤출 때만은 서로를 ‘리스펙’ 한다. 동고동락한 댄서들은 함께 울고 웃는다.
이상한 일이다. 경쟁과 갈등은 자연스러운 것인데, 여자들이 주체면 늘 문제가 됐다. ‘여적여’ 프레임에 빠지거나, 교정해야 하는 공격성으로 여겨졌다. 댄서들은 이러한 딜레마를 산뜻하게 돌파한다. 가장 눈에 띄기를 열망하는 동시에 무대를 위해 적극적으로 협조한다. SNS상에서 서로를 응원하며 악마의 편집이 납작하게 눌러버릴 수 없는 관계를 이어간다. 각 팀의 리더가 자신의 크루를 ‘우리 애들’, ‘내 새끼’라고 부르며 극진히 챙기는 모습 또한 인상적이다. 8인의 리더는 각양각색이고, 위기 상황에서 자신만의 리더십을 발휘한다. 누군가는 다정하게 공감하고, 누군가는 적극적으로 편을 들며, 누군가는 엄격하게 몰아친다. 결과가 어떻든 크루원들을 다독이며 자신이 책임지려 한다. 시청자들은 각 리더의 유형에 따라, 선생님이었다면 어울렸을 가상의 급훈을 매칭하며 논다. 리더를 따르는 크루원들의 신뢰는 단단하고 애틋하다. 중압감을 헤아리고 적극적으로 협조하는 태도는 밀도 높은 팀워크로 이어진다. 소년만화에 빠져 있던 내가 보고 싶었던 게 바로 이런 모습이었다.
‘좋아하는 거 하자.’ <스우파>를 꾸준히 관통하는 문장이다. 그럴 수밖에. 춤은 즐거울 때 춘다. 누군가는 슬플 때 힙합을 춘다지만, 몸을 움직여야 하기에 자신의 안에서 솟아오르는 강력한 동력이 필요하다. 홀리뱅의 리더 허니제이도, 프라우드먼의 모니카도, 웨이비의 노제도. 인정받지 못할까봐 전전긍긍하고 좋은 평가에 눈물 흘리면서도 자신의 중심을 강조한다. 춤은 남에게 보이는 행위고, 강렬한 정서적 감응을 이끌어내야 하는 일이다. 그래서 더더욱 나의 고유함이 소중하다는 메시지를 던지는 <스우파>는 힘이 세다.
10월2일 기준, <스우파>는 5화까지 방영되었다. 내로라하는 크루를 불러놓고 만든 탈락 제도는 거센 비난을 받았다. 미션 때마다 크루들은 탈락할까봐 마음 졸인다. 상업 음악에 치중된 파이트 저지의 평가나, 인지도 싸움이 될 수 있는 조회 수와 ‘좋아요’ 점수도 석연찮다. 가장 기이한 부분은 1위 크루가 탈락 후보를 선정할 수 있게 한 규정이다. 댄서들에게 춤 외의 다른 전략(꼼수)을 계속 생각하도록 만든다. 좀 더 댄서를 존중하고 퍼포먼스에 집중하는 포맷일 순 없었을까? 처음에는 다른 경연 프로그램과 달리 우승 상금에 대한 어떤 정보도 없다가, 여론이 불거지자 뒤늦게 추가된 점도 아쉽다. 이런 문제점을 댄서들이 몰랐을 리 없다. 웨이비의 노제는 탈락할 때 모두가 즐겁게 춤췄으면 좋겠다고 말한다. 오로지 춤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이 프로그램에 나온 것이 느껴지고, 탈락하면서도 누군가를 원망하는 대신 동료들을 챙기는 소감이었다.
<스우파>의 기획의도는, 세계적인 위상을 자랑하는 K팝 아이돌 뒤에 가려져 있던 댄서들에게 스포트라이트를 비추겠다는 것이다. 생각해보면 우리는 너무 쉽게 중심과 배경을 구별하고 위계를 부여한다. 전면으로 나온 댄서들은 각자의 색깔로 빛난다. ‘백(back)댄서’가 아니라, 댄서로서. 가슴 벅차는 서사다. ‘나’도 누군가의 배경이 아니라 내 무대의 주인공이다. Hey~ 스트릿 우먼 파이터~ hey! ‘스트릿’의 자리에 자신의 영역을 붙여보자. 갑자기 호랑이 기운이 솟아날지도 모르니. 나는… 라이터(writer) 우먼 파이터? 라우파?!
이진송 계간 홀로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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