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 달 수 없는 '올바름'은 누가 만들었나

선명수 기자 2021. 10. 1. 1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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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기리노 나쓰오의 <일몰의 저편>은 ‘정치적 올바름’의 외피를 쓰고 표현의 자유를 틀어막는 세태를 예리하게 파고든 디스토피아 소설이다. 소설은 이른바 ‘민주 시민’의 열광 아래 조용히 몸집을 불리는 파시즘의 형상을 정면으로 다룬다. 경향신문 자료사진

일몰의 저편

기리노 나쓰오 지음·이규원 옮김 | 북스피어 | 368쪽|1만5800원

“나는 기본적으로 세상일에 흥미가 없다. 절망한 탓이다. 어느새 시민이 아니라 국민이라 불리게 되었고 모든 일에 국가가 우선이며 사람들은 자유를 빠르게 국가에 넘겨주었다. 뉴스는 인터넷으로 보고 있었는데, 집권한 정권에 아부하는 논조에 진저리가 나서 이제는 쳐다보지도 않는다. 물론 텔레비전은 내다 버렸고 신문도 구독을 끊었다.”

환멸로 거리를 두던 세상은 곧 맞이할 지옥의 예고편이었을까. 고양이 한 마리와 함께 살며 성애 소설을 주로 써온 작가 마쓰 유메이는 ‘총무성 문화국 문화예술윤리향상위원회’라는 생소한 이름의 국가기관으로부터 소환장을 받는다. 독자의 제소가 있었으니 숙박 준비물을 챙겨 출두하라는 것이다. 어쩐지 불길하고 불쾌하지만 큰일이야 있을까 싶었던 그는 간소한 짐을 챙겨 소환장에 적시된 장소로 나가고, 그 길로 어느 고립된 요양소에 감금된다.

사실상 ‘작가 수용소’인 이곳에서 일하는 공무원이 밝힌 감금 이유는 간단했다. 정치적으로 올바르지 않는 소설을 쓰는 작가를 처벌해 달라는 독자들의 고발이 있었으니, 여기서 잘못을 깨닫고 ‘좋은 소설’을 쓰라는 것. 즉 요양소는 정신적으로나 사상적으로 ‘썩어 있는’ 작가들의 갱생과 교정을 위한 공간이라는 얘기다.

시대를 막론하고 언론과 표현의 자유를 입맛대로 통제하려는 국가권력은 존재해 왔다. 민주적 선거 절차를 거쳐 합법적으로 집권한 정치권력도 예외는 아니다. 일본의 소설가 기리노 나쓰오의 장편 <일몰의 저편>은 민주주의의 이름 아래, ‘정치적 올바름’이라는 외피를 쓰고 글과 말을 틀어막는 세태를 예리하게 파고든 소설이다. 소설 속 국가권력은 작가들을 감금하고 무자비한 폭력을 휘두르는데, 이들에게 “정치적으로 올바른 소설”을 쓰라고 강요하는 주체는 국가이지만 그 뒤엔 다양성도 맥락 이해도 거부하는 대중이 있다.

절벽과 바다로 둘러싸인 채 인터넷도 전화도 차단된 고립된 시골 요양소에 다양한 작가들이 끌려온다. 외설, 폭력, 범죄, 체제 비판적인 내용이 담긴 작품을 발표했다면 그게 어떤 맥락에서 쓰였든 고려하지 않는다. 전후 맥락을 완전히 무시한 채 등장인물의 대사 한 마디로 작품의 윤리성을 재단하고, ‘여성·남성 혐오 소설’ ‘인종차별 소설’ 등의 딱지를 붙인다. 강간과 소아 성애증을 소재로 한 소설을 발표한 작가 마쓰는 이것은 소재일 뿐 결코 이런 범죄를 옹호하는 것이 아니라고 항변해 보지만, 이 기묘한 정부 조직은 “헤이트스피치법이 통과되었다”며 모든 창작물에 이를 적용한다는 말만 반복할 뿐이다.

기소나 재판도 없이 사람을 감금하는 것은 불법이라고 저항해도 모든 항의는 벌점으로 쌓여 수용 기간만 늘어난다. 다른 수용자들과의 접촉도, 대화도 철저히 금지된다. 결국 이곳에서 나갈 수 있는 방법은 하나뿐이다. 그들의 요구대로 ‘좋은 소설’, “마음이 맑아지는 이야기”를 쓰는 것이다.


“설사 나라는 작가가 변질된다고 한들 그게 무슨 대수냐,라는 생각도 들었다. 이 요양소에서 평안을 얻을 수 있다면, 그리고 희망을 가질 수 있다면 뭐든 할 마음이 있었고, 겨우 7주간의 변질 따위는 오랜 작가 인생에 비추면 아무것도 아니지 싶었다.” 입소 순간부터 격렬한 저항으로 벌점이 쌓인 마쓰는 결국 요양소 소장이 원하는 글을 쓰기 시작한다. 그때마다 흙맛이 나는 수돗물 대신 마치 포상처럼 얼음이 들어간 시원한 냉수, 제로 콜라 따위를 마실 수 있게 된다. 마쓰는 이것이 자신을 길들이는 방법이란 걸 알면서도 빨리 이곳에서 나가기 위해 순응하기로 한다. 그러다 우연히 베갯잇 안에서 이전 수감자의 유서를 발견하게 된 그는 아무리 순종하더라도 살아서 이곳에서 나갈 수 없음을 깨닫게 된다.

마지막까지 결말을 예측할 수 없는 소설이다. 공포스럽고 무자비한 수용소를 그린 픽션이지만, 그 안의 내용은 광적인 지지자들을 대중으로 포장해 그들의 감시와 요구에 따라 스스로를 검열하도록 만드는 오늘날의 어떤 ‘민주주의’의 풍경과 닮아 있다. 작가는 소설 속 인물 마쓰의 입을 빌려 이렇게 말한다. “세계 어디서나 통하는 토를 달 수 없는 정론. 그런 선의의 정론이 전 세계에 만연해 있어서 참으로 숨이 막혔다.”

일본의 사회문제를 정면으로 다룬 어둡고 강렬한 색채의 소설을 발표해온 작가 기리노 나쓰오는 지난 10여년간 일본의 사회적 경향을 체감하며 이 소설의 문제의식을 갖게 됐다고 한다. 진실과 맥락보다 성급한 단죄와 조롱이 지배하는 온라인 공간, 그런 흐름을 검증 없이 ‘논란’으로 부추기는 미디어, 아베 집권 후 만들어진 특정비밀보호법 등 정치권력의 통제 시도 등이 집필의 배경이 됐다. 일본 사회에 국한하지 않더라도, 세계 곳곳 민주주의 한복판에서 ‘다중’의 이름으로 포퓰리즘과 전체주의가 독버섯처럼 자라나는 상황에서 이 책이 쓰였다. 한국이라고 다를까. “알아서 기게 된” 마쓰를 바라보며 비열하게 이죽거리는 요양소 소장의 표정에서 어떤 민주주의자들의 모습이 겹쳐진다.

이른바 ‘민주 시민’의 열광 속에 조용히 몸집을 불리는 파시즘의 형상을 예리하게 담아낸 디스토피아 소설이다. 소설이 그리는 ‘일몰의 저편’이 그저 허구처럼 느껴지지만은 않는 이유다.

선명수 기자 sms@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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