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식 시비로 일제 형사 때렸다가 꼬리 밟힌 조선공산당[동아플래시100]

이진 기자 2021. 10. 1. 11: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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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5년 12월 1일

플래시백

그날은 일요일이었습니다. 1925년 11월 22일이었죠. 늦은 저녁때였고요. 신의주의 한 요릿집에서 회식이 벌어졌습니다. 청년단체인 신만청년회의 한 회원이 결혼을 한다고 해서 축하모임을 하는 중이었죠. 분위기가 달아올라 노래를 부르고 몇몇은 춤을 추기까지 했습니다. 꽤 떠들썩했겠죠. 그런데 다른 방에서는 변호사 의사 냉면업자 같은 유지들이 신의주경찰서 형사들과 저녁자리를 하고 있었습니다. 이들이 참다못해 ‘조용히 하라’고 말했습니다. 평소 행세깨나 하던 이들이고 형사까지 함께 있었으니 명령조로 요구했다고 합니다. 청년들은 혈기왕성하겠다, 술도 마셨겠다, ‘나리님’ 호령이 고깝기도 하겠다, 순순히 따르지 않았죠. 말다툼이 몸싸움으로, 집단폭행으로 번졌습니다. 물론 청년들의 우세승이었죠.



하지만 얻어맞은 경찰이 가만있을 리 없었습니다. 땅에 떨어진 대일본제국 형사의 체면을 살리기 위해서라도 본때를 보이겠다고 마음먹었겠죠. 신만청년회 사무소와 회원들 집을 수색하기까지 했습니다. 그런데 한 회원의 집에서 미심쩍은 서류가 발견됐습니다. ‘고려공산청년회 중앙집행위원회’ 명의로 된 문서였죠. 고려공산청년회 책임비서가 중국 상하이로 보내려던 비밀문서의 일부였습니다. 이제 사건이 경찰 단순폭행에서 사회주의 비밀결사 조직으로 갑자기 바뀌었죠. ‘사상사건’ 처리에 둘째간다면 서러워할 경성 종로경찰서 형사들까지 투입됐습니다. 동아일보 1925년 12월 1일자의 짧은 2단 기사는 최초의 대규모 사회주의운동 탄압사건인 제1차 조선공산당 사건의 시작을 알리는 소식이었습니다.

①1925년 4월 17일 조선공산당 창당대회가 열린 경성 황금정 1정목의 중국음식점 아서원 ②조선공산당과 관련된 증거서류와 당의 도장이 압수된 경성 입정정 주택. 입정정은 현재 서울 중구 입정동이다.


이미 그해 4월 17일 경성 황금정 1정목에 있는 중국음식점 아서원에서 조선공산당 창당대회가 비밀리에 열렸습니다. 황금정 1정목은 지금의 을지로 1가입니다. 책임비서가 된 김재봉을 비롯해 19명이 참석했습니다. 그런데 19명 중 70%에 가까운 13명이 ‘화요파’ 소속이었죠. 3명은 ‘북풍파’, 나머지 3명은 ‘상하이파’였죠. 당시 국내 사회주의세력의 양대 산맥 중 하나였던 ‘서울파’는 없었습니다. 통합 노력이 없진 않았지만 서울파와 화요파의 거리가 좁혀지지 않았죠. 서울파는 해외 사회주의세력을 못마땅해 했지만 화요파는 그렇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다음날인 18일 조선공산당 산하조직인 고려공산청년회가 창립됐습니다. 고려공산청년회는 한술 더 떠 지도부가 온통 화요파 일색이었죠.

1925년 4월 18일 창립대회를 연 고려공산청년회 주요 구성원들. 박헌영이 책임비서로 뽑혔고 유일한 여성 주세죽은 박헌영의 아내였다. 오른쪽 기와집은 창립대회가 열린 박헌영의 경성 훈정동 집. 지금의 종로구 훈정동이다.


조선공산당이 발각된 뒤 얼마 되지 않아 궤멸상태에 빠진 이유는 일제의 마구잡이 탄압 때문이었습니다. 의심나면 일단 붙잡아 가혹하게 취조했습니다. 증거로 삼을 자백을 받아내기 위해 끔찍한 고문을 서슴지 않았죠. 일제 고등경찰 미와 이사부로의 “유치장이나 고문실에 넣어두면 벌써 나의 물건이 되고 만다”라는 말로 그 공포를 얼마간 가늠할 수 있습니다. 조사과정에서 초죽음이 된 다음 형편없는 감옥으로 넘겨져 골병이 들었습니다. 1차 조선공산당 때 붙잡힌 청년 4명이 재판이 열리기도 전에 숨진 배경이었죠. 더구나 5월부터 ‘국체를 변혁 또는 사유재산제도를 부인할 목적으로 결사를 조직한 자…’로 시작되는 치안유지법이 시행됐습니다. 일제에 저항하는 운동가들은 이미 손안의 공깃돌 신세였습니다.

조선공산당 관련자 검거 소식을 전한 동아일보의 속보성 기사들. 기사에 검거되거나 압송된 사람들의 얼굴사진을 넣었다. 오른쪽은 1925년 12월 13일자, 가운데는 12월 14일자, 왼쪽은12월 16일자이다.


1차 조선공산당 관련자들은 경찰에 붙잡혀 간 뒤 제대로 소식을 알 수 없었습니다. 누가 체포됐다는 짧은 기사만 이따금 신문에 실릴 뿐이었죠. 일제는 이듬해 2차 조선공산당 관련자들을 붙잡아 조사했습니다. 1차는 신의주, 2차는 경성의 법원에서 각각 예심이 진행됐죠. 프랑스 제도를 직수입한 일제의 예심제도는 판사가 사건을 기약 없이 조사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사이토 마코토 총독이 두 사건을 묶어 처리하라고 명령했습니다. 결국 조선공산당 관련자들은 1927년 9월에야 법정에 나올 수 있었죠. 일제는 그때서야 언론에 사건 개요를 공개했습니다. 일제 사법제도의 한 단면입니다.

과거 기사의 원문과 현대문은 '동아플래시100' 사이트(https://www.donga.com/news/donga100)에서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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