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가 대중들의 철학이 될 수 있었던 이유.. 한국 천만영화를 통해 보다 [화제의 책]
[경향신문]
대중의 철학이 된 영화
심광현·유진화 지음|희망읽기|338쪽|2만원
오랫동안 마르크스주의 이론의 비판적 재구성과 대안적 문화예술 및 진보 지식운동을 위해 헌신해 온 심광현 교수가 정년퇴임을 앞두고 아내와 함께 <대중의 철학이 된 영화>를 출간했다. 영상원 영상이론과 퇴임을 앞두고 마지막 학기를 이 책으로 갈무리하는 것은 여러모로 의미가 깊다. 그건 단지 기존의 영화 관련 저서에서 볼 수 없는 독특한 이론과 관점을 제시한 영화저서를 출간했다는 의미만이 아니다. 이 책에서 제시하는 복합적인 이론 틀이나 분석방법론, 그리고 한국의 대중영화를 바라보는 긍정적인 시각들은 저자의 오랜 연구와 교육, 그리고 문화현장 활동이 집대성된 것이다.
이 책은 영화저서로서 세 가지 특이성을 갖는다. 첫 번째는 영화에 대한 정의의 특이성이다. 저자는 영화, 특히 2000년대 이후 흥행에 성공한 한국영화를 대중의 철학 관점에서 정의하고 있다. 그동안 영화를 철학으로 설명하거나, 철학을 영화로 설명하는 저서들은 많이 있었지만, 영화 자체의 존재적 가치를 대중의 철학으로 정의한 경우는 없었다. 저자의 가설은 이렇다. 2000년대 신자유주의의 심화 속 경제 양극화와 사회적 차별에 시달리는 상황에서 한국 관객들은 영화를 통해 각자 잊고 지내던 삶의 의미와 방향을 잠시나마 재고하는 철학적 성찰의 기회를 갖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민주화 이후 고양된 정치의식과 역사의식을 한국 대중영화가 잘 담았기 때문에 한국 관객들은 사회·경제적 갈등과 정치·역사적 의식 간 모순을 헤쳐 나가는 데 필요한 삶의 이정표를 영화를 통해서 찾았다는 것이다. 정치·사회적 이슈를 다루면서도 흥행에 성공한 한국영화는 단순한 오락물이 아니라 대중들의 인생관과 세계관을 확장하고, 새롭게 연결해주는 대중철학인 셈이다.
두 번째는 대중철학으로서 영화가 어떻게 관객들에게 전달되는가에 대한 이론적 특이성이다. 사실 이 부분이 매우 난해하고 복잡하다. 영화의 물질성, 시각적 전달체계, 미적 특이성을 이론적으로 설명하는 영화 저서들은 많지만 정신분석학, 뇌과학, 역사지리학, 인지생태학, 미학을 복합적으로 엮어서 영화의 존재를 설명한 경우는 거의 없었다. 이 복잡한 이론적 구성을 여기서 다 설명할 수는 없다. 정신분석학의 ‘소원-성취’, 뇌가 영화에 반응하는 ‘마음의 지도’, 그리고 ‘영화-사회-대중’의 상호작용으로서 ‘인지생태의 순환’, 이 세 가지 관점이 이론적 핵심이다. ‘소원-성취’는 대중이 영화를 통해 갖는 무의식의 욕망이자 현실 억압에서 벗어나고 싶은 카타르시스를 말한다. 한국 사회의 역사는 이러한 소원-성취의 욕망과 좌절의 역사이고, 영화는 꿈속 소원-성취보다 더 선명하게 대리 충족시켜준다. 인간의 뇌는 개인의 소원-성취의 욕망과 좌절을 복합적으로 인지하고 느끼게 해준다. 뇌는 단지 지각의 전파회로가 아니라 외부세계와 내부의 가치 평가를 연결하고 조정하는 다중지능적인 복잡계 네트워크이다. 복잡계 네트워크로서 뇌는 대상으로서 영화를 인지하는 과정에 영화가 생산하는 사회적 메시지와 그것을 보는 개인의 잠재성을 연결시켜주는 역할을 한다. 이 과정이 바로 인지생태학이다. 현실의 문제들→영화→관객 마음의 변화→현실의 변화로 이어지는 인지생태학적 순환이 대중철학으로서 영화의 중요한 내적 원리이다.
마지막으로 한국영화의 특이성에 대한 해석이다. 저자는 매우 복잡한 이론으로 영화의 존재와 가치를 설명하고자 노력하는데, 그에 비해 다루고자 하는 영화는 대부분 큰 흥행을 이룬 대중영화들이다. 통상 영화이론서에서 다루는 영화텍스트들은 난해한 영화들이 주를 이루는데 이 책은 2000년대 이후 관객 1000만명 이상을 동원한 19편의 한국영화를 대상으로 하고 있다. 난해한 복합 이론과 대중적인 영화텍스트 사이의 간극은 어떤 점에서 저자가 의도적으로 기획한 것이 아닌가 싶다. 저자 스스로 언급했듯이 2000년대 한국의 1000만 영화 현상은 그람시가 말했던 ‘독창적인 철학적 사건’에 해당한다. 한국영화가 큰 흥행을 거두면서도 대중들의 철학이 될 수 있었던 것은 그 흥행의 서사가 한국 정치의 역사적 특이성과 민주주의의 역동적인 삶을 살아온 한국 관객 사이의 상호작용의 결과이기 때문이다. 영화는 이 둘 사이를 연결하는 ‘소원-성취’의 파노라마이다. 이 책이 궁극적으로 개념지도를 그리고 싶은 “역사지리와 인지생태학의 순환”이 바로 대중철학으로서 영화의 존재이유이다.
이동연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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