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기는 싫으면서 천국엔 가고 싶은', 팬데믹 시대에 생명의 의미를 묻다
[경향신문]
죽기는 싫으면서 천국엔 가고 싶은
에이미 거트먼, 조너선 D. 모레노 지음·박종주 옮김|후마니타스|440쪽|2만2000원
여러 사람이 죽음의 위기에 처했을 때 일부만 살릴 수 있다면, 누구를 살릴 것인가. 마이클 샌델의 <정의란 무엇인가>에 나오는 사고 실험은 매우 단순한 상황을 제시하는데, 선뜻 답하기 어렵다. 당신은 전차 기관사다. 시속 100㎞로 질주하는 중인데 작업 도구를 들고 있는 인부 5명이 앞쪽 철로에 서 있는 것을 발견한다. 브레이크는 고장나 말을 듣지 않는다. 비상 철로 쪽으로 방향을 트는 수밖에 없는데, 그쪽에도 1명의 인부가 서 있다. 방향을 틀어 5명을 살릴 것인가, 그대로 질주해 1명을 살릴 것인가. 양적 공리주의 측면에서 보면 다수를 살린다는 답을 낼 수도 있다. 하지만 생명의 가치를 저울질할 수는 없다는 생명윤리적인 관점에서 본다면 정답은 없다.
의학과 과학기술이 발달하면서 현대 사회에서는 생명의 가치에 대해 고민하게 만드는 상황들이 기차사고 실험보다 훨씬 복잡하게, 일상적으로 발생한다. 책 <죽기는 싫으면서 천국엔 가고 싶은>에서는 9·11테러 이후 탄저병 백신을 두고 미국 정부가 고민하던 상황이 나온다. 테러 몇 주 뒤 탄저균 포자를 담은 봉투를 이용한 공격으로 5명이 사망하고 17명 이상이 감염되며 탄저병 백신의 중요성이 커졌다. 저자들은 오바마 정부의 생명윤리위원회의 탄저병 백신 논의를 상세히 다뤘다. 성인 대상 탄저병 백신은 있었으나, 아동을 대상으로는 안전성이 입증되지 않았다. 국가안보 체제는 아동 탄저병 백신 시험을 서둘러 진행하라는 압박을 가했다. 위원회에서는 ‘어떤 아동도 기니피그(실험용 쥐)로 쓰여서는 안 된다’는 원칙과 ‘인도적인 사회에서 모든 아동을 미래의 치명적인 질병의 공격에 무방비 상태로 내버려 두는 것이 정당화될 수 있는가’라는 기준을 두고 고민을 거듭했다. 고민 끝에 위원회에서는 가장 나이 어린 성인들에게 백신을 시험한 후에 점진적으로 연령을 하향해 “시험 과정이 아동들에 대한 백신 시험에 예외적인 윤리 문제를 일으키지 않도록” 검토에 검토를 거듭하며 임상시험을 진행했다.
<죽기는 싫으면서 천국엔 가고 싶은>은 미국을 중심으로 생명윤리학 개념이 정립되고 발전해온 역사를 다루고, 현대 생명윤리학의 쟁점들을 살피는 책이다. 제목은 오래된 블루스 곡인 ‘Everybody Wants to Go to Heaven but Nobody Wants to Die’에서 따온 것으로, 좋은 삶과 죽음을 추구하지만 그와 관련된 고민은 소홀히 하곤 하는 사람들의 태도를 재치 있게 담은 것이다. 오바마 정부에서 ‘생명윤리학적 쟁점 연구 대통령 직속 위원회’(생명윤리위원회) 의장을 지낸 정치철학자이자 에이미 거트먼과 함께 위원회에서 활동한 선임위원 조너선 D 모레노가 썼다. 생명윤리 개념이 미국에서 중요하게 다뤄지기 시작한 1960년대부터 코로나19를 겪는 최근까지 주요 분기점이 된 사건과 쟁점을 소개한다.
1960년대 미국에서는 의료비가 상승하면서 보건의료 서비스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이 높아졌다. 또한 의료윤리라는 것이 의사의 직업윤리만이 아니라, 환자와 그 가족을 포함해 광범위한 시민까지 참여해 논할 수 있는 윤리라는 인식이 점점 커졌다. 언론을 통해 인간이 마치 ‘기니피그’처럼 취급된 몇몇 대형 사건들도 세상에 알려졌다. 터스커기 매독 생체 실험 사건은 의료윤리의 필요성을 일깨운 대표적인 사건이다. 미국 공중보건국에서는 앨라배마주 터스커기 지역에서 매독에 감염돼 있던 흑인들을 일부러 치료하지 않으면서, 매독의 영향을 알아보는 실험을 실시했다. 1932년부터 1972년까지 실험이 지속됐으며, 600명의 아프리카계 미국인 소작농이 직접적으로 연관됐다. 이를 계기로 1974년 생명윤리위원회가 설립됐다.
1980년대와 1990년대에 사람들은 비윤리적 인체 실험의 시기가 끝났다고 생각했지만, 임상시험과 관련된 생명윤리학의 고민거리들은 더 많이 생겨난다. 안전성이 완벽히 입증되지 않은 약물인데, 환자가 원한다고 해서 환자의 몸을 시험 및 치료 대상으로 삼는 것은 윤리적으로 옳은가. 미국에서는 2018년 ‘시도할 권리(Right to Try)’라는 이름을 가진 연방법이 통과됐는데, 이를 두고서는 논쟁이 계속된다. 반대론자들은 효능에 대한 명확한 증거가 없는 약물들이 널리 사용되는 사회적 분위기가 생길까 우려한다. 저자들은 “인간을 대상으로 잠재적으로 사회적으로 중요한 실험을 하는 것은 어떤 조건에서 윤리적일 수 있는가?”라는 질문이 계속해서 나올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또 ‘새 원칙’을 만들기 위해 과학적 근거뿐 아니라 윤리적 추론도 함께 고려되는 숙의민주주의의 필요성을 강조한다.
‘존엄사’로 대표되는 죽음에 대한 고민은 더욱 깊어지고 있다. 기술 발전으로 인해 죽음의 양태도, ‘좋은 죽음’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각도 다양해졌다. 보육원 교사였던 브리트니 메이너드는 2014년 뇌암의 일종인 다형성 교모세포종 진단을 받았다. 여섯 달 정도 더 살 수 있다는 시한부 판정이 내려진 가운데, 의료진은 부작용이 심각하나 수명을 최대한 연장할 수 있는 뇌 방사선 요법을 권했다. 메이너드는 “추천받은 치료법들이 내게 남은 시간을 파괴해 버릴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삶을 원하는 시점에 끝낼 수 있게 해달라며 마지막 남은 몇 달 동안 ‘의사조력죽음’ 운동을 벌였다. 책은 “현대 의료의 상당 부분은 수명 연장에 초점을 맞춤으로써 ‘우리 인간성의 본질적 요소’로서 죽음을 대하는 일을 너무도 자주 무시한다”고 지적하며 우리가 죽음에 대해 더 많이 말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한국에서도 2018년 2월부터 회생 가능성이 없는 환자가 자신의 결정이나 가족의 동의에 따라 연명치료를 받지 않을 수 있게 하는 ‘연명의료결정법’이 시행됐다. 다만 이 제도 도입 하나만으로 ‘좋은 죽음’에 대한 논의가 종결돼서는 안 될 것이다.
이 밖에도 책은 비용 부담 없는 보편적 보건의료 접근성, 장기이식, 재생산 기술 등 첨예한 생명윤리학의 쟁점을 다룬다. 또 유전자편집, 합성생물학, 뇌과학 등 첨단 의료 기술이 부과하는 새로운 선택들을 조명한다. 책을 읽을수록 “우리 삶의 모든 단계들이 현대 의학, 보건의료, 공중보건, 생명과학 연구가 제기하는 윤리적 난제들과 맞물려 있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책의 뒷부분에서는 현재 인류가 겪고 있는 가장 큰 생명윤리학적 난제인 코로나19를 다룬다. 2019년 출간된 책의 개정판이 2020년에 나오면서 ‘팬데믹 윤리’라는 40쪽 분량의 저자 후기가 추가됐다. 저자는 물리적(사회적) 거리 두기가 바이러스 확산을 통제하는 데 필수적이지만, ‘대가’를 치러야 하는 방식이라는 점을 짚는다. 미국에서는 거리 두기로 인해 2020년 4월에 응급실 방문이 급락해 “일부는 위험한 결과로 이어지거나 후일 다른 질환이 증가할 위험을 각오해야” 하는 상황에 처했다. “팬데믹에 따른 감정적 피해는 눈에 덜 띄지만, 여러 달이 흐르자 실업률이 증가하고 공중보건의 질이 하락하는 것과 더불어 정신 질환 또한 늘었다.” 미국 여러 병원에서는 집중치료실이 중증 호흡기 환자로 넘쳐나게 되면서 평시에는 생각할 필요도 없던 ‘산소호흡기 접근 배분 문제’에 대해 의료진이 진지하게 고민하게 됐다. “생명윤리학의 핵심 질문 중 하나이기는 하지만, 갑작스레 더 이상 학술적인 논쟁의 문제가 아니게 되어 버린” 상황을 겪은 것이다.
저자들은 “팬데믹 윤리의 본질은 알지 못하는 타인에게 마음을 쓰는 집단적 헌신”이라는 대원칙을 강조하면서 “이것이야말로 공중보건 위기 속에서 우리 자신, 우리의 가족, 친구를 잘 돌볼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고 말한다. 다행히 세계 곳곳에서 아직은 작지만 ‘팬데믹 윤리’를 지키려는 움직임이 일고 있다. 지난 8월 세계보건기구(WHO)는 코로나 취약국의 백신 접종률이 올라갈 때까지 미국 등 선진국이 자국민 추가 백신 접종(부스터샷)을 보류하라고 권고했다. 지난 9월29일(현지시간) 하버드 의과대학 소속 의사들은 백신 제조회사인 모더나의 스테판 반셀 최고경영자(CEO)의 미국 보스턴 자택 앞에서 ‘코로나19 백신 평등’ 시위를 열고 취약국을 위해 코로나 백신 기술 공유를 적극적으로 해야 한다고 외쳤다. “연대해 행동하는 것은 호시절의 고매한 일로 보일지 모르지만, 실은 팬데믹을 헤쳐나갈 수 있는 길은 여기에 달려 있다.”
이혜인 기자 hyein@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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