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는 '탄소중립'을 넘어서야 한다
[김상현 서강대 트랜스내셔널인문학연구소 교수(naeori@pressian.com)]
'탄소중립'(carbon neutrality)에 대한 사회적 요구가 그 어느 때보다 높아지고 있다. 전 지구적으로 나타나고 있는 폭염, 가뭄, 한파, 집중호우, 홍수, 태풍, 병해충의 증가, 그리고 코로나19와 같은 신종 감염병의 대유행 등 이상기후와 생태계의 교란은 기후위기가 먼 미래가 아닌 현재의 문제이며 더 이상의 악화를 막기 위해 경제와 사회 전반의 탈탄소화가 시급하다는 문제의식을 확산시키는 데 큰 역할을 했다. 다른 한편, 제품을 해외로부터 수입할 때 해당 제품의 생산 과정에서 직·간접적으로 발생한 온실가스 양에 따라 수입자가 온실가스 배출권을 구매하도록 하는 '탄소국경조정제도'의 도입이 유럽연합의 법안 발표로 가시화되면서 이제까지 탈탄소화에 적극성을 보이지 않았던 산업계 내에서도 탄소중립에 나서야 한다는 의견에 힘이 실리고 있다.
사실 이러한 흐름은 때늦은 감이 있다. 2018년 발간된 IPCC의 <지구온난화 1.5℃> 특별보고서는 산업화 이전 대비 지구 평균기온의 상승을 1.5℃ 이내로 억제하지 못한다면 기후 생태계의 심각하고도 회복 불가능한 훼손으로 수많은 이들의 건강, 안전, 식량, 물 공급, 주거와 생계가 위협받게 될 것임을 경고한 바 있다. 특별보고서는 이어 전 세계 이산화탄소 배출량을 2030년까지 2010년 배출량 대비 최소 45% 이상 감축하고 2050년까지 탄소중립을 달성할 것을 권고했다. 지난 8월 IPCC가 공개한 제6차 제1실무그룹 보고서는 2018년 특별보고서가 제시한 탄소배출 감축 로드맵조차 기후위기 대응에 미흡하다는 점을 보여주기도 했다. 산업화 이후 1.5℃의 지구온난화 도달 시점을 이전의 예상보다 10년이 앞당겨진 2040년으로 예측한 것이다.
같은 달 대통령 직속 탄소중립위원회가 발표한 '탄소중립 시나리오'가 기후·환경운동 단체의 거센 비판에 직면하고 있는 것은 이 같은 추세에 정면으로 반하고 있기 때문이다. 현 정부의 2030년 국가온실가스감축목표(NDC)는 아직 2017년 배출량 대비 24.4% 감축에 머물고 있다. 이는 2010년 배출량의 18.5%에 해당하는 것으로 <지구온난화 1.5℃> 특별보고서가 권고한 감축량의 과반에도 못 미칠 뿐 아니라 박근혜 정부의 NDC와도 다를 바 없는 수준이다. 그런데 탄소중립위원회는 이를 상향하는 시나리오를 마련하기는커녕 2030년 NDC를 아예 시나리오에 포함하지도 않았다. 더 나아가 제출된 3가지 시나리오 중 2개를 2050년까지 탄소중립에 이르지도 못하고 석탄 혹은 가스 화력발전을 유지하는 안으로 채우는 비상식적인 모습을 보였다.
탄소중립위원회의 이처럼 어처구니없고 함량에 미달하는 행보를 마주하다 보면 2030년 NDC의 상향과 2050년 탄소중립의 실현을 정부와 정치권에 더욱 강력하게 압박해야 한다는 결론으로 자연스럽게 이어지지 않을까 싶다. 그러나 여기에는 주의해야 할 함정이 자리하고 있다.
일반적 통념과 달리 탄소중립이 곧 기후 복원력을 지닌 생태 지속가능한 경제와 사회로의 탈탄소화 전환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2000년대 중반 이후 널리 사용되어온 탄소중립 개념은 탄소포집·저장 등 기술적 해법과 시장주의적 '탄소상쇄' 제도를 통해 '순'(net) 배출 제로에 도달하는 것을 의미한다. 탄소배출이 지속되어도 탄소를 흡수할 것으로 인정되는 사업에 투자하거나 탄소시장에서 상쇄배출권을 구매하면 '순' 배출이 감축된다는 논리다. IPCC의 <지구온난화 1.5℃> 특별보고서도 이를 재확인하고 있는데, 보고서는 탄소중립을 “인간에 의한 이산화탄소 배출이 이산화탄소의 인위적 제거에 의해 일정 기간 지구적 균형을 이뤄 '순 제로'(net zero) 배출이 성취”되는 상태로 정의한다. 탄소중립 개념은 시장·기술 중심 접근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는 것이다.
진정한 탄소중립은 생태계의 자연적인 탄소흡수력을 넘지 않는 수준까지 탄소배출을 온전히 감축시키는 것이어야 한다고 항변해볼 수 있겠지만, 효과가 있을지는 의문이다. IPCC, 기후변화협약 사무국과 각국 정부는 오래도록 시장·기술 중심 접근에 뿌리를 둔 탄소중립 개념을 사용해왔고, 각종 제도와 법규도 그에 기반해 구축해왔다. 이들에게 탄소중립 개념을 사용하되 다른 의미를 부여하라고 강제하는 것은 그다지 현실적이지 않아 보인다. 게다가 많은 자연적인 탄소흡수원은 탄소 포화점에 이르렀거나 근접한 상황에 놓여 있다. 지난 10년간 아마존 숲이 흡수한 이산화탄소 양보다 방출한 양이 더 많다는 연구 결과들이 나오고 있기도 하다. 기존 산업의 온실가스 배출을 유지하는 것이 목표가 아닌 이상 순 제로 배출이 중요성을 지니기 어려운 것이다.
최근에는 탄소중립 개념이 온실가스 배출 감축을 지체시키고 기후불평등과 부정의를 심화시키는 데 기여하고 있는 현실을 있는 그대로 직시하고 그에 대한 반대의 입장을 분명히 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점차 높아지고 있다. 지구의 벗 국제본부, CA(Corporate Accountability), 지구산림연대의 세 단체가 올해 6월 발표한 보고서 '대사기극'(The Big Con)은 그 한 예이다. 350.org, 지구의 벗 유럽, 원주민환경네트워크 등 전 세계 60여 환경·사회운동 단체의 지지를 받은 이 보고서는 시장·기술 중심 접근에 의존하는 순 제로 탄소배출의 추구가 화석연료 에너지의 대량 생산·소비로부터 막대한 이윤을 취해온 산업·금융 대자본에 기후위기를 야기한 책임을 지우기보다는 거꾸로 이를 회피·지연하고 그로 인한 부담을 민중에게 전가하고 있다고 강하게 비판한다.
아닌 게 아니라 화석연료 산업은 이산화탄소 장기 저장의 실현 가능성, 안정성 및 건강·환경 영향에 관한 논란이 계속되고 있는 탄소포집·저장을 탄소중립을 이루기 위한 핵심 경로로 내세우며 온실가스 배출 감축을 최대한 늦추는 빌미로 활용하고 있다. 이들은 또 순 제로 배출을 위한 탄소배출권 상쇄를 겨냥해 산림·습지 보호와 복원 등 이른바 '자연-기반 해법'(nature-based solutions) 사업에도 대대적으로 투자하고 있는데, 탄소흡수력의 확충 효과는 불투명한 반면 토지·임야의 상업화, 생물다양성 침해, 지역의 공동체적 삶 붕괴 등의 문제만 일으키고 있다는 지적이 제기되고 있다. 그 와중에 상쇄배출권 시장은 빠르게 확대되고 있고 ESG 투자 붐과 맞물려 관련된 각종 파생 금융상품이 쏟아져 나오면서 '재난자본주의'의 새로운 장으로 떠오르고 있다.
이렇게 보면 탄소중립위원회의 문제는 탄소중립을 제대로 추진하지 못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탄소중립을 목표로 삼는 것 자체에 있다. 탄소중립에 대한 집중은 사회·경제·환경적 불평등 및 부정의와 분리될 수 없는 기후위기의 구조적 측면을 외면하고, 노동자 민중의 삶을 시야에서 배제하며, 시장·기술 중심 접근을 당연한 것으로 전제함으로써 기후위기 대응을 지배적인 정치경제 질서에 조응하는 방식의 온실가스 감축 차원으로 축소해버리는 '탄소환원주의'(carbon reductionism)를 강화시킬 뿐이다. 안타깝게도 탄소중립의 신화와 탄소환원주의의 경향은 정부와 정치권만이 아니라 기후·환경운동 내에서조차 상당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윤과 성장 중심의 정치경제체제를 비판하면서도 정작 시장·기술 중심 접근에 대한 검토가 부족했기 때문일 것이다.
이제 기후·환경운동은 탄소중립의 굴레에서 벗어나야 한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지구온난화 1.5℃의 억제를 위해 남아 있는 '탄소예산'(carbon budget)을 부문별로 추정하고 그에 따라 탄소배출을 '실질적'으로 감축해나가되 그러한 탈탄소화 과정이 사회·경제·환경 정의에 부합되고 기후위기 최전선 민중의 삶을 중심에 놓을 수 있도록 그리고 궁극적으로 평등하고 민주적이며 생태 지속가능한 정치경제체제와 사회구조로의 전환으로 이어질 수 있도록 싸워나가는 일이다. 탄소중립은 체제전환을 지향하는 기후정의의 길에서 넘어서야 할 장애물이지 추구해야 할 목표가 될 수 없다.
[김상현 서강대 트랜스내셔널인문학연구소 교수(naeori@pressi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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