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민군 피해 11일간 물만 마시며 월남.."기차에서 뛰어내리기도 했지"
일기장에 전쟁 기록 '빼곡'..공비 토벌 땐 밥통 속에도 시체가
(부산=뉴스1) 노경민 기자 = "오로지 나라를 지키겠다는 마음으로 전쟁에 임했지."
1950년 한국전쟁에 참가한 이원호옹(89)은 전쟁 당시를 떠올리며 깊은 생각에 잠겼다.
<뉴스1>은 10월1일 국군의날을 맞아 부산 사하구에서 6·25 참전용사 이옹의 생생한 전쟁 스토리를 들어봤다.
이옹은 원래 평안북도 철산 출신이다. 출생지로만 보면 인민군에 복역해야 했지만, 그는 국군이 되겠다는 일념 하나만으로 1950년 11월3일 고향을 떠났다.
월남 과정은 순탄치 않았다. 영토를 빼앗겼던 국군은 인천상륙작전 이후 다시 북진하기 시작했다. 당시 이옹이 살던 철산에는 인민군들이 남한으로 향하는 사람들을 총으로 쏴 무참히 사살했다.
"북한 괴뢰군을 만나면 수천명씩 쏴 죽이는데, 바닥에 시체가 쌓일 정도였어. 고향에서 탈출한 지 11일째 멀리서 총을 든 군인들이 있었지. '괴뢰군이면 죽고, 국군이면 산다'는 생각이 가장 먼저 떠올랐어."
그는 조심스레 앞으로 향했다. 천만다행이 국군이었다. 11일 동안 아무것도 먹지 못하고, 물만 마신 고생 끝에 결국 월남에 성공했다. 이때부터 그의 인생은 본격적으로 바뀌기 시작했다.
이옹은 6.25 전쟁이 발발하자마자 인민군에 7번 잡혀갔다고 한다. 하지만 끔찍이도 북한군이 되기 싫었던 그는 인민군으로 가득 찬 기차에서 뛰어내리기도 했다.
그는 입대한 지 1주일만에 전장에 투입됐다. 1사단 15연대 1대대 수색중대에 입대한 그는 박격포 탄약수 임무를 맡았다.
국군은 1951년 1월 중공군이 대규모로 투입되면서 수적 열세에 놓였다. 이옹 역시 직접 설치한 임진강 방어선이 뚫리자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후퇴하는 도중에 가장 친한 친구가 큰 바위 아래 쪼그려 앉아 있더라. 며칠간 제대로 먹지도 못해서 힘이 없어 더이상 후퇴하긴 어렵다고 하는데, 그래도 그냥 둘 수 있나. 이 친구를 직접 업고 중공군으로부터 탈출했지."
그는 멀리서 보이는 전투차량 헤드라이트를 따라 산을 타고 전라도까지 내려왔다. 인민군은 군 항공기를 거의 보유하지 못한 반면, 국군은 미군 항공기가 많아 전투 차량이 마음대로 다닐 수 있다는 점을 이용한 것이다.
이후 전주에서 11사단 20연대로 재입대한 그는 '0720168' 군번을 달고 다시 전투에 참여했다. 1950년 9월 연합군의 인천상륙작전 성공 후 퇴로가 막힌 인민군과 빨치산은 지리산 속에 숨어 지냈는데, 이옹은 이들을 잡는 '공비 토벌' 작전을 맡았다.
연일 전투를 치르느라 심신은 지칠 대로 지쳤지만, 밥통에 시체가 섞여 나온 적이 다반사였다고 한다. 특히 동양인 체구에 맞지 않는 미제 M1 소총을 몸에 지니고 다니느라 매우 힘들었다고 회상했다.
이옹은 '884고지 향로봉 전투'를 전쟁에서 가장 기억에 남던 순간이라고 말했다. 884고지 뒤에는 원산~서울 국도가 있었는데, 향로봉에서 국도까지 포 사정거리가 닿지 않아 인민군들이 득실했다고 한다.
"괴뢰군들이 미군 항공기만 뜨면 라이트를 끈 채로 숨죽이면서 왔다갔다 하더라고. 국군에서 반드시 884고지를 점령하라는 명령이 떨어졌지. 그 때 1개 중대에 190명이 있었는데, 많이 살아 돌아와도 13명밖에 없었어."
"마침 전술에 능한 김 소위님이 계셨는데, 중대장 허가를 받고 특공대원 5명을 끌고 산 꼭대기까지 올라가더라고. 정상에서 '대한민국 만세!'를 외치는데 인민군들이 전부 뿔뿔이 도망갔었지."
이옹은 1953년 2월 장교가 되기 위해 광주 육군학교에 입교했다. 졸업을 한달 앞둔 7월27일 남한과 북한은 휴전 협정을 맺는다. 그는 육군 중위까지 복역을 마치고 1956년 전역했다.
그는 한국전쟁을 이렇게 회상했다. "나라가 원망스럽거나 그런 건 없었어. 단지 국가를 위해 몸 바치고 오직 살아야겠다는 일념 하나만 갖고 버텼지."
전쟁 당시 생생한 그의 이야기는 전부 일기장에 녹아 있었다. 낡은 일기장을 살펴보면서 전쟁 참전용사들의 숨결이 느껴졌다.
전쟁을 치르면서 글을 쓰는 것 자체가 매우 힘든 일이지만, 이 옹은 글을 쓰는 것을 좋아해 당시 상황을 모두 기록해 놨다.
blackstamp@news1.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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