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대, 대중은 '천만 영화'로 철학을 했다

최원형 2021. 10. 1. 05: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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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의 철학이 된 영화
심광현·유진화 지음 l 희망읽기 l 2만원

2003년 이후 2019년까지 국내에서 천만 명 이상의 관객을 끈, 이른바 ‘천만 영화’는 모두 27편이다. 한국 영화는 19편에 달하는데, 이 가운데 9편이 역사를 다룬 ‘사극’이다. 특히 <변호인>처럼 근현대사를 다룬 작품들은 체제 비판적인 성격도 강하게 드러낸다. 이런 사실들은 과연 무엇을 뜻할까?

<대중의 철학이 된 영화>는 ‘문화연대’ 창설, 계간 <문화/과학> 발행 등 문화운동을 주도해온 심광현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영상원 영상이론과)와 그의 아내 유진화가 함께 쓴 책이다. 지은이는 ‘천만 영화’를 주된 소재로 삼아 한국의 역사지리적 배경과 대중의 의식적·무의식적 정신적 변화의 과정 사이의 상호작용과 그 함의를 읽어 나간다. 철학, 영화이론뿐 아니라 인지생태학까지 동원해 통섭적인 방식으로 나름의 ‘이론화’를 꾀하는 것이 특징이다.

기본적으로 지은이는 “오늘날 대중영화는 기존의 철학이 제공하지 못하는 철학적 실천의 본연의 역할을 의도치 않게 대신 떠맡게 됐다”고 본다. 영화는 정신분석학, 뇌인지과학과 함께 인간의 의식과 무의식을 매개하는 회로로서, 분과학문으로 잘게 쪼개지는 등 제대로 기능하지 못하는 ‘대문자 철학’ 대신 대중의 인생관·세계관을 수정하거나 재통합하는 등의 ‘철학적 실천’을 담당하고 있다는 것이다.

특히 대중영화는 “가장 빠른 시간에 가장 많은 대중들의 마음을 흔들며 좌절된 소원-성취 꿈의 실현을 위한 다양한 해법을 시뮬레이션해 ‘뇌-뇌 소통’을 활성화하는 장치”라 할 수 있다. 대중영화는 현실 속 모순(미메시스1)을 영화-이야기로 재현(미메시스2)하는 동시에, 이를 통해 관객들로 하여금 현실 속 모순을 다시 보게(미메시스3) 만든다. 지은이는 이때 대중영화가 관객들에게 일으키는 효과가 ‘모순의 봉합·전위에 따른 현실 순응·체념’(미메시스3-1) 또는 ‘모순의 응축·폭발에 따른 현실 비판·변혁’(미메시스3-2) 등 두 가지 방향으로 나타날 수 있다는 점에 주목해, “삼중 미메시스의 순환 구조”가 있다고 주장한다.

2019년작 ‘천만 영화’ <기생충>의 한 장면. 시제이이앤엠(CJENM) 제공

이렇게 볼 때, 2000년대 한국의 ‘천만 영화’는 주로 “현실의 모순에 틈새를 벌려 희망의 불씨를 지피는 방식으로 현실 정치를 앞서가며 모순을 극복하는 과정에 기여”하는 방식으로 ‘이데올로기적 균열 혹은 비판’ 효과를 보였다고 평가할 수 있다. 지은이는 19편의 ‘천만 영화’ 가운데 <태극기 휘날리며> <국제시장> <7번방의 선물> <도둑들> 정도를 제외하면 대다수 영화들이 “신자유주의적 축적 체제-통치 체제-지배 이데올로기의 일치 국면이 결코 안정적이지 않았을 뿐 아니라 시간이 지날수록 지배 이데올로기와 대중의 이데올로기적 지향 사이에 균열이 커졌음을 시사한다”고 지적한다. 또 이는 현실 속에서 “아래로부터의 대중정치의 확산”과도 밀접한 연관성이 있다고 짚는다.

2016~2017년 ‘촛불항쟁’에서 드러나듯 이처럼 소원-성취의 욕망은 한껏 불타올랐지만, 지은이는 “‘광장의 정치’에서 제기된 수많은 요구들과 문재인 정부의 후퇴한 개혁 사이에 증폭된 간극”이 있다고 본다. 그는 2014년작 <명량>과 2019년작 <극한직업>을 비교하며 이런 풀이를 내놓기도 한다. “<명량>이 ‘세월호 참사’의 극한적 위기 국면을 역사적 사건을 매개로 가상적으로 재현함과 동시에 2년 후 촛불항쟁을 소원-성취의 형식으로 시뮬레이션했다면, <극한직업>은 신자유주의에 의해 가속화된 일상적 삶의 해체 국면을 가상적으로 재현함과 동시에 2020년대에 민중적 협력을 통한 아래로부터의 사회변혁의 전망을 소원-성취의 형식으로 시뮬레이션한다.”

이밖에 영화와 정치의 변증법, 한국 ‘진보적’ 포퓰리즘에 대한 분석과 전망, 에스에프(SF) 영화에 대한 이해 등을 다룬다. ‘천만 영화’ 10편에 대한 리뷰를 ‘철학적 에세이’로 정리해 보기도 한다.

최원형 기자 circl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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