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평로] “가장 한국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인 것이다”

김광일 논설위원 2021. 10. 1. 0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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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오징어 게임’은 재밌다. 필자를 포함해 주변 사람들이 이구동성 “오지게 재밌다”고 했다. 우리는 왜 재밌다고 느낄까. 왜 이웃 나라, 먼 나라 관객도 빠져들까.

넷플릭스 '오징어게임'

한마디로 실감나기 때문이다. 드라마는 “그럴듯해야” 재밌다. 소설가 이청준이 갈파했듯 “스토리 속 감동의 본질은 실감(實感)에 있다”고 본다. 실감이 나야 관객은 몰입한다. 바로 “눈을 뗄 수 없었다”고 할 때다.

“재미없는 글은 범죄”라는 각오로 목숨 걸고 써내려간 이야기가 눈을 뗄 수 없게 만든다. 모르는 이야기는 잘 쓸 수 없다. 그래서 장르 불문, 작가는 자신의 삶을 베낀다.

이 드라마엔 이혼 실직자, 투자 실패자, 건달 양아치, 채무자, 외국인 노동자, 탈북 소매치기, 부랑 노인 등이 등장한다. “어느 날 없어져도 아무도 관심 갖지 않을 것 같은” 사람들이다. 이들은 어두운 사회 현실을 거울처럼 비추면서 ‘살기 위해 목숨을 건다’는 역설의 게임에 마지막으로 자신을 내던진다. 루저들이 최후로 선택한 생사의 무대만큼 절박하게 “그럴듯한” 상황은 없다.

‘오징어 게임’의 황동혁 감독은 지구촌을 떠들썩하게 만든 성공 비결을 이렇게 정리했다. “룰이 매우 단순한 게임이다.” “가장 한국적인 게임이 세계적 소구력을 갖는다.”

이 드라마에 나오는 게임은 룰이 단순한 정도가 아니라 그냥 딱 하나다. 처음 나오는 딱지치기의 룰은 내 딱지로 상대 딱지를 뒤집느냐 못 뒤집느냐다.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의 룰은 술래 인형이 뒤를 돌아본 순간 내가 움직이고 있었나 정지해 있었나, 이것 하나다. 줄다리기 룰은 상대를 끌어오느냐 아니면 내가 끌려가느냐다. 구슬치기는 상대가 손에 쥔 구슬 수가 홀인지 짝인지 맞히면 된다.

언어적, 문화적, 역사적 번역 따윈 필요 없다. 섬뜩한 단순함이 우리를 얼어붙게 만들고 때론 들썩이게 만든다. 그것이 싸이의 ‘말춤’처럼 국경을 뛰어넘고 세대(世代)를 초월하게 한다. 또 룰이 단순하면 게임 참가 인원을 무제한 늘일 수 있다. 드라마 속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와 줄다리기에 사실상 수억 관객이 참여하고 있는 셈인데 전혀 불편하지 않다.

황 감독은 이 드라마를 처음 구상했을 때가 2008년이라고 했다. 당시 그는 “이런 이야기가 낯설거나 황당하다는 반응은 없을까” 걱정했다고 한다. 그로부터 13년이 흘렀다. “(그 사이에) 슬프게도 살벌한 서바이벌이 잘 어울리는 세상이 됐다”고 했다. 이젠 주식, 코인, 부동산으로 한탕을 노리는 대박 신화의 경연대회가 매일 벌어지고 있다.

때로 작가적 상상력은 현실을 못 따라갈 지경이다. 드라마 속 최후 승자가 거머쥐는 돈이 456억원인데, 현실에서는 ‘4000억원 대장동 게이트’가 신문을 도배하고 있다. 필자가 아는 어떤 소설가는 자신의 작품 속에 엄마가 두 아이를 데리고 목숨을 끊는 장면을 넣었다가 후회했는데, 얼마 뒤 신문을 보니 세 아이를 데리고 투신한 엄마 이야기가 사회면에 실려 있더라고 했다.

‘오징어 게임’은 루저들의 피비린내 나는 목숨 잔치다. 일확천금이거나 죽거나, 둘 중 하나다. 루저에게 다른 선택권은 없다. 극 중 대사처럼 체스의 폰, 장기의 졸 같은 존재다. 반면 생사의 무대를 조종하는 플레이어는 억만장자다. 플레이어와 폰의 극렬 대비가 높은 전압을 발생시켜 드라마를 온 세상에 퍼뜨리는 힘이 된다.

극 중 게임이 어디서 처음 발생했는지 원산지를 따지는 일은 시시하다. 문화의 본질은 섞인다는 데 있다. 필자도 어렸을 때 오지게 놀았던 게임들이다. 무엇보다 드라마가 한국 땅에서 한국어로 진행됐으니 일단은 한국 게임이다. “가장 한국적인 것이 가장 보편적일 수 있다”는 문화계 명제가 입증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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