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사일언] 藥, 물과 함께 드세요

정재훈 약사·'음식에 그런 정답은 없다’ 저자 2021. 10. 1. 0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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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은 융통성이 없다. 알약이나 캡슐을 입에 물고 물을 찾으면 안 되는 이유다. 약은 그런 긴급 상황에 대한 준비가 전혀 안 되어 있다. 그 잠깐을 못 기다려주고 입술에 들러붙는다. 물을 찾아 마시려고 할 때는 이미 늦는다. 억지로 입을 벌리려다가 입술이 찢어지고야 만다. 그러니 정제, 캡슐제를 복용할 때는 반드시 물을 먼저 준비해야 한다. 미리 물을 한두 모금 마셔서 입안을 충분히 적셔주고 그다음에 약을 복용해야 안전하다.

일러스트=김도원 화백

물 없이 알약을 삼키는 것도 위험하다. 영화 속 주인공은 물 없이 약을 멋지게 잘도 삼킨다. 하지만 영화는 영화일 뿐. 현실 세계에서 약은 그런 일을 허락하지 않는다. 물 없이 삼키면 알약은 식도에 착 들러붙어 식도점막 천공을 유발할 수 있다. 물 한 잔을 쭉 마셔주는 건 약을 위장까지 멈춤 없이 전달하기 위해 중요한 일이다.

약에 대해 공부한 의사, 약사라고 봐주는 일도 없다. 영국의 유명한 의사이자 작가인 맥스 팸버튼은 그걸 몰랐다. 물 없이 항생제 알약을 삼켰다가 식도에 구멍이 나서 일주일 병원 신세를 지고야 말았다. 물로 약을 삼키고 나서도 바로 눕지 말아야 한다. 알약이 위장까지 무사히 도착하길 기다려야 한다. 식도점막에 들러붙으면 위험한 약이 무려 100종이 넘는다.

입이 아닌 항문으로 주입하는 관장약도 융통성 없기는 매한가지다. 관장약은 왼편으로 누운 상태로 넣어줘야 한다. 오른쪽으로 누우면 안 되냐고? 다시 말하지만 약에는 그런 융통성이 없다. 관장약을 넣으면 최소한 5분 정도는 머무르도록 해야 효과를 낸다. 하지만 오른쪽으로 누워 관장약을 넣으면 바로 쏟아져버린다.

사실 약한테만 뭐라 할 일은 아니다. 약이 이렇게 융통성 없어 보이는 건 우리 몸 때문이기도 하니 말이다. 대장이 한 방향으로 꼬여 있으니 관장약을 왼쪽으로 누워서 넣어야 한다. 입술에 모공이 없으니 땀과 피지를 분비할 수 없다. 알약을 잠시만 입에 물고 있어도 들러붙는 것도, 날씨가 조금만 건조해져도 립밤을 발라줘야 하는 것도 다 입술의 구조 때문이다. 알고 보면 우리 몸도 약만큼 융통성이 없다. 앞으로 바뀔 거 같지도 않다. 그냥 내가 지는 셈 치고 약 먹을 때 물부터 챙겨야겠다.

정재훈 약사·'음식에 그런 정답은 없다’ 저자

※10월 일사일언은 정재훈씨를 비롯해 소현 2021 조선일보 신춘문예 미술평론 부문 당선자, 장보영 ‘아무튼, 산’ 저자·트레일 러너, 이영숙 동양고전학자·'사랑에 밑줄 친 한국사’ 저자, 빈우혁 화가가 번갈아 집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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