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굴 당한 '도굴 왕' 조조의 무덤.. 헛된 욕망의 쳇바퀴[강인욱 세상만사의 기원]

강인욱 경희대 사학과 교수 2021. 10. 1. 0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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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허난성 안양시에서 발견된 조조의 무덤 모습. 도굴이 한참 진행된 후에야 발견한 이 무덤은 손상이 심각했다. 사진 출처 허난성문물고고연구원 ‘조조고릉’ 보고서(2016년)
강인욱 경희대 사학과 교수
《최근 중국 허난성에서 삼국지 주인공 중 하나인 조조의 무덤이 발견돼 큰 화제와 논란을 낳았다. 조조는 살아생전 수많은 도굴을 해 악명 높았는데, 그의 무덤 역시 여러 차례 도굴된 초라한 모습으로 발견됐다. 조조의 무덤을 통해 수많은 영화의 소재가 되기도 했던 도굴의 역사와 의의를 살펴보자.》
9000년 전 도굴의 흔적


인간이 무덤을 만든 이래 다른 사람의 무덤을 파헤치는 행위는 꾸준히 있었다. 심지어 9000년 전 신석기시대 차탈회위크(¤atalh¨oy¨uk) 유적에서도 과거 사람들의 무덤을 의도적으로 파낸 흔적이 보일 정도였다. 유라시아 유목민들 사이에서도 서로의 무덤을 경쟁적으로 파헤치는 것이 일상적이었다. 일정한 집이 없이 유목하는 기마 민족들은 정복할 성이나 도시가 없기 때문에 요즘으로 말하면 ‘현충원’과 같은 역할을 했던 조상들의 무덤을 파헤쳤다. 그리고 그 무덤 속 보물은 함께 전쟁에 참가한 부하 장수들에게 나눠주는 전쟁의 ‘성과급’ 역할도 했다.

도굴이 기승을 부리게 된 시점은 국가가 등장하고 왕이나 귀족들이 경쟁적으로 자신의 무덤에 수많은 보물을 넣어 저세상에서도 영화를 이어가고자 하면서부터다. 보물을 묻은 화려한 무덤이 많아지면서 무덤 속 보물을 탐내는 사람들도 늘어났다. 삼국지의 간웅(奸雄) 조조는 중국 역사의 대표적인 도굴의 왕으로 꼽힌다. 중국 사서 ‘후한서’에 따르면 원소와 조조가 전쟁할 때 조조가 무덤을 파헤치는 부대인 발구중랑장(發丘中郞將)과 보물을 긁어모으는 모금교위(摸金校尉)라는 부대를 만들었다. 이들이 기원전 2세기 살았던 한나라 왕족인 양효왕(梁孝王)을 비롯해 여러 무덤을 도굴해 군자금을 모았다고 한다. 그가 정확하게 얼마나 많은 유물을 털었는지는 제대로 기록이 남아있지 않다. 하지만 이름 없는 무덤이 아니라 대놓고 한나라 왕족의 무덤을 파헤칠 정도로 조조의 도굴은 무척이나 체계적이었으니 최초의 ‘전문적인 도굴 전문가’라 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다.

‘조조의 활약’ 이래로 중국에서 도굴은 지금까지도 계속되고 있다. 암시장에서는 갓 도굴한 듯한 새로운 물건들이 끊임없이 등장하는 상황이다. 심지어 내몽골 훙산(紅山)문화에서는 발굴단에 참여한 연구원이 국보급 옥기를 도굴해 판매하다 검거된 적도 있다.

도굴로 발견된 조조의 무덤

위무왕(魏武王)이라는 글씨가 새겨진 석비. 위나라의 무왕은 조조가 맞지만 역사 기록에 그를 ‘위무왕’이라 쓴 적은 없어서 진위 논란에 휩싸였다. 사진 출처 허난성문물고고연구원 ‘조조고릉’ 보고서(2016년)
2008년 봄 대표적인 중국 역사도시인 허난성 안양시에서도 옛 무덤들이 도굴된다는 첩보가 입수됐다. 이 무덤들은 그 이전부터 도굴이 많이 이루어진 지역이라 크게 주목받지는 못했다. 이 도굴된 무덤은 그 전부터 몇 차례 도굴된 적이 있었고, 급기야는 무덤의 벽에서 화상석(畵像石·그림을 새긴 벽체)까지 뜯어서 팔아넘기기 시작했다. 도굴이 한참 진행되고 난 이후 2008년 말이 되어서야 고고학자들은 가장 파괴가 심한 2개의 무덤에 들어갔다. 현장을 보니 상황은 참담했다. 무덤에는 3m가 넘는 구멍이 뚫려서 최근까지도 사람들이 자유롭게 넘나들며 유물을 가져갈 수 있었고, 남아있는 것은 바닥에 남겨진 자잘한 유물 400점 정도에 불과했다. 남아있는 유물들을 하나씩 수습하던 고고학자들은 무덤 바닥에 새겨진 글자들을 판독하다 순간 눈을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위무왕(魏武王)이라는 글씨가 새겨진 돌로 만든 표들이 다수 나온 것이다. 조조는 무왕이라 불렸고, 그가 세운 나라는 위(魏)나라이니, 바로 조조인 셈이다. 이 꼬리표에 묶여 있던 유물은 다 도굴되고 이 표들만 남은 것이다. 2010년에 중국 정부는 공식적으로 조조의 묘가 발견됐다고 공표했다. 도굴의 왕 조조의 무덤은 아이러니하게도 다른 사람의 도굴 덕에 발견될 수 있었다고 사람들은 감탄했다.

사라지지 않는 진위 논란

조조의 무덤에서 나온 인골. 인골은 60대로 추정돼 당시 조조의 사망 시기와 유사하다. 사진 출처 허난성문물고고연구원 ‘조조고릉’ 보고서(2016년)
하지만 발표 후 이 무덤이 조조의 것이 맞는지 많은 논란이 불거졌다. 무덤방의 크기는 약 400m². 물론 귀족급 무덤이긴 하지만 과연 삼국을 통일한 조조의 것이라고 하기엔 너무 초라했다. 게다가 도굴당한 탓이긴 하지만 유물도 빈약했다. 이와 관련한 논의를 진행한 중국 고고학계는 기록된 조조 무덤의 위치, 발굴된 인골의 연령이 60대인 점(조조는 66세에 사망) 등을 들어 공식적으로 조조의 무덤이 맞는다는 최종 보고서를 2016년 발표했다. 하지만 지금도 여전히 의심은 가시지 않고 있다.

무덤에서 ‘조조’를 의미하는 글자가 나왔는데 뭐가 문제냐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런데 논란은 바로 그 글자에 있었다. 조조는 살아생전 ‘위왕’이라 불렸고, 한나라는 그가 죽자 ‘무왕’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그러니 ‘위무왕’이라는 이름이 나오기 어렵다. 그리고 하필 글자도 귀중품이 아니라 돌로 만든 꼬리표에서만 나왔기에 누군가가 유물을 위조해서 넣었다는 설도 유포돼 혼란을 가중시켰다.

분명한 점은 조조도 자신의 무덤이 도굴당할 것을 무척이나 걱정했다는 것이다. 도굴에 앞장서고 의심도 많았으니 당연했다. 그는 자신의 무덤에 봉분(무덤 위에 높게 쌓는 둔덕)을 쌓거나 주변에 나무를 심지 말고, 귀중품을 넣지 말며 수의도 평범하게 하라고 했다. 사치스럽게 무덤을 만들 경우 도굴의 표적이 됐기 때문이다. 게다가 조조가 가짜 무덤을 사방에 두었다는 이야기도 끊임없이 돌았다. 남송 시대 책에도 조조가 가짜 무덤 72개를 만들어 수많은 도굴꾼이 그의 무덤을 찾아 헤맸지만 정작 진짜를 못 찾았다고 할 정도였다. 이 말이 맞는지는 모르지만, 적어도 영민한 조조가 자기 무덤이 쉽게 도굴되지 못하도록 여러 조치를 취한 것은 분명하다.

이런 까닭에 조조 무덤의 진위 논란은 향후에도 계속될 것으로 보인다. 옥새와 같이 왕을 상징하는 뚜렷한 증거 없이 초라한 돌로 만든 꼬리표 몇 개만이 근거가 되고 있기 때문이다. 고고학자들의 잘못이 아니다. 본인이 했던 것처럼 그의 무덤도 수없이 도굴되었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아무도 조조의 무덤을 완전히 확신할 수 없게 된 것을 과연 조조는 기뻐할지 궁금할 뿐이다.

목숨 건 음침한 도박

어디 중국뿐인가. 일제강점기 한국 유물은 엄청난 피해를 입었다. 조선 총독과 같은 관리, 장사꾼은 물론 유물을 지켜야 할 박물관장 등 너나 할 것 없이 유물을 도굴했으니, 우리도 도굴의 큰 피해를 입은 국가다. 영화에서 신나게 묘사되는 보물 탐험의 이야기는 알고 보면 우리의 슬픈 역사이기도 하다.

왜 이렇게 도굴은 끊이지 않을까. 부귀영화를 어떻게든 죽어서까지도 이어가려는 인간의 부질없는 욕망이 그 근본적 원인이다. 어두컴컴한 무덤 속을 뒤져서라도 재화를 얻고자 하는 도굴꾼의 욕망 또한 크게 차이가 없다. 인간의 역사와 함께 끊임없이 이어져온 도굴은 이렇게 엇갈리게 표현된 인간의 욕망이 만들어낸 뫼비우스의 띠가 아닐까. 참혹하게 도굴돼 논란이 되고 있는 조조의 무덤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그가 살아생전 쌓은 업적 못지않을 것 같다.

강인욱 경희대 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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