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신교 첫 여성 총회장으로서 '선한 역사의 도구' 되겠어요"

정대하 2021. 9. 30. 2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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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짬][짬] 전북 익산중앙교회 김은경 목사
김은경 한국기독교장로회(기장) 총회장이 지난 9월29일 제106회 총회에서 당선 소감을 발표하고 있다. 사진 기장 제공

기독교장로회 교단에서 여성 총회장이 처음으로 나왔다. 개신교 전래 136년, 장로회 선교 106년 만이다. 합수윤한봉기념사업회 이사장을 맡고 있는 김은경(66) 익산중앙교회 목사는 지난 28·29일 충북 청주 제일교회에서 열린 ‘한국기독교장로회(기장) 제106회 총회’에서 총회장으로 당선됐다. 1983년 기장 교단 총회장을 지낸 송상규 목사는 김 총회장의 시아버지다. “장로회 교단에서 여성 총회장 당선도 처음이고 시아버지와 며느리 2대 총회장 당선도 처음”이다.

김 총회장은 30일 전화 인터뷰에서 “코로나19 대유행이라는 어려운 시기를 맞아 선한 역사를 이루는 데 빛의 도구로 쓰이겠다”고 말했다.

지난 29일 제106회 기장 총회에서 ‘당선’
개신교 전래 136년·장로회 106년만
‘시아버지·며느리 2대 총회장’ 기록도

부친과 교유 함석헌 영향 ‘한신대’ 진학
‘5·18 수배자’ 윤한봉 밀항 도와 ‘고초’
‘임을 위한 행진곡’ 첫 녹음 때 노래도

1977년 무렵 경기도 다산 정약용 생가 부근 두물머리에서 ‘스승’ 고 함석헌(오른쪽) 선생과 함께한 김은경(왼쪽) 총회장. 그무렵 함 선생의 권유로 그는 한신대 진학을 하기로 결심했다. 김은경 총회장 제공

김 총회장이 목회자가 된 것은 사상가 고 함석헌(1901~89) 선생의 영향이 컸다. 광주 양림교회를 다녔던 청소년기 때부터 아버지와 인연이 있던 함 선생은 그를 손녀처럼 아꼈다. 김 총회장은 “정말 소년의 눈높이로 내려오셔서 친구처럼, 손자처럼 저를 가르쳐주셨던 스승이자 할아버지셨다”고 회고했다.

광주 전남여고 재학 시절부터 그는 <씨알의 소리> 등을 읽으며 역사와 교회 등 사회적인 문제로 고민했다. “사회운동하는데 대학이 무슨 필요야?”라고 생각해 대학에 진학하지 않았다. 광주여성기독교청년회(YWCA) 특별사업부 간사로 농촌문제에 관심을 갖고 기독교 청년운동을 했다.

김 총회장은 1977년 무렵 ‘평화모임’을 꾸리고 함 선생을 광주로 모셔서 공부했다. 함 선생은 고 장기려 박사가 있던 부산으로 성경공부 모임을 가던 길에 광주에 들러 청년들을 만났다. “실존과 역사와 신앙에 대해 고민이 많았던 시기였어요. 기독교 신앙이 역사의 하나님과 함께 진보를 이룩하는 게 물과 기름처럼 떨어지는 게 아니라고 하셨던 말씀이 기억에 남아요.” 경이로운 가르침이 가슴에 꽉 박혔다. 그러던 그에게 함 선생은 “호걸 노릇하지 말고 한국신학대학에 진학하라”고 강력하게 권유했다. 그는 “지금도 어려운 고민이 생기면 할아버지가 잠들어 계시는 국립대전현충원에 가곤 한다”고 말했다.

1981년 4월 김은경 총회장의 배웅을 받고 미국행 밀항선에 올랐던 ‘5·18 마지막 수배자’ 윤한봉은 12년 뒤인 1993년 5월19일 귀국해 기자회견을 했다. 창비 제공

김 총회장은 1980년 5월 서울에서 한신대를 다니고 있었다. 하지만 송백회 창립에 주도적으로 참여하는 등 광주 재야·청년 운동권 인사들과 연을 맺어온 그가 5·18을 비껴갈 순 없었다. ‘5·18 최후의 수배자’ 고 윤한봉 선생의 1981년 4월 미국 밀항 때 여동생으로 위장하고 마산까지 동행한 것도 그였다. “서울 강남터미널에서 한봉 오빠를 만났는데 햇볕을 못봐서인지 꼭 결핵 환자처럼 보이더라고요. 그래서 ‘오빠는 마산 병원 가는 결핵 환자고 나는 여동생으로 하자’고 했어요.” 그는 이듬해 윤한봉의 미국 밀항 사실이 알려지는 바람에 남영동 치안본부 대공분실로 끌려가 고초를 당했다.

그는 한국의 대표적 민중가요 ‘임을 위한 행진곡’ 제작에도 참여했다. 널리 알려진대로, 1982년 5·18 시민군 대변인 고 윤상원과 들불야학 노동자 고 박기순의 영혼결혼식을 위한 노래극 <넋풀이-빛의 결혼식>에 들어있는 곡이다. 그해 2월 소설가 황석영 작가의 집에서 녹음했던 이 노래를 대학생 오정묵이 선창한 뒤 그와 임희숙씨가 함께 불렀다. 그는 그해 4월19일 한신대 개교기념일 때 기숙사 친구들과 함께 노래극을 그대로 재현했다. ‘임을 위한 행진곡’이 세상 밖에서 불렸던 첫 공연이었다.

1982년 2월2일 광주 황석영 작가 집에서 녹음한 ‘임을 위한 행진곡’ 첫 테이프. 한신대생이던 김은경 총회장이 오정묵·임희숙씨와 함께 노래를 불렀다.

김 총회장의 삶은 그뒤 오월에서 ‘예수’로 이어졌다. 신학대학에 들어갈 때 그는 두 가지를 고백했다. “무엇보다 분단된 한반도에서 연좌제로 아픔 당한 사람들을 주변에서 많이 봤어요. 그래서 목사가 되면 이들의 우산이 되겠다고 다짐했죠.” 또 하나는 “열악한 상황에 놓인 여성과 어린이 등 사회적 약자를 위한 목회자가 되겠다”고 마음을 다잡았다. 목사 안수를 받던 2000년 6월15일은 남북 정상이 분단 이래 처음 만던 날이다. 그는 “하나님께서 내 마음에 잠들어 있던 소명을 다시 한 번 확인시킨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통일운동을 줄곧 해 온 그는 현재 전북겨레하나 이사장도 맡고 있다. “1987년생 아들을 군대에 보내던 날 훈련소 운동장에 갔더니 많은 사람이 울고 있더라고요. 왜 국가가 개인들에게 이렇게 눈물을 흘리게 하는가, 새삼 질문을 하게 됐죠.” 이후 그는 기장 교단에서 월요 기도회를 통해 끊임없이 통일과 평화의 마음을 모으는 데 힘을 모으고 있다. 그리고 2007년 가정폭력과 성폭력을 당한 국제결혼이주여성들을 위해 지역에선 처음으로 쉼터를 만드는 등 여성권익운동에도 관심을 쏟고 있다.

그는 사회적 약자의 편에 서는 데 주저함이 없었다. 지난해 장로교 총회에서 최초 여성 부총회장에 당선됐던 그는 중대재해기업처벌법 처리를 촉구하며 국회 앞에서 단식 농성을 했다. 또 최근 총회에서도 ‘성소수자 목회 연구위원회’ 존속안과 ‘2022년 남북평화통일 공동기도회 개최와 한반도 종전 평화 캠페인 방안’ 등의 사회적 현안을 담은 안건을 통과시켰다.

김 총회장은 “늘 어려울 때마다 빛이 됐던 한국 교회의 역사를 회복하도록 교단과 함께 가겠다”고 다짐했다.

정대하 기자 daeh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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