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중에 떠있는 사과·바위.. 초현실적 순간의 아름다움

김예진 2021. 9. 30. 2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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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준 사진작가 개인전 '온 그래비티:방향과 좌표'
쏟아지는 댐 물·눈 마주친 새 등 작품
초고속 카메라로 찰나의 순간 포착
옥상에서 뛰어 내릴듯한 여성 모습 등
특유의 풍경사진, 세계의 주목 받아
왼쪽부터 원 라이프(One Life) #20, 무제 #34
“살아있다는 것은 마치 중력이 있는 공간에 던져진 물체와 같았다. 선택의 여지 없이, 어쩔 도리 없이 시공을 가르며 죽음을 향해 달려가는.”

인간을 세상에 ‘던져진 존재’라고 했던 철학자 마르틴 하이데거가 아직 살아있었다면, 한국인 작가 안준의 작품세계에 얼마나 흠뻑 빠져들었을까.

안 작가는 어린 시절 어느 날, 처음으로 죽음에 대해 생각했던 날을 기억한다. 소녀 안준은 엄마에게 “내가 자라면 엄마 아빠가 늙어 죽기 때문에, 더 이상 자라고 싶지 않다”고 했다고 한다. 내가 선택해서 태어난 것이 아닌데 일단 태어나 자라고 늙어 죽고 그 가운데는 가족과 헤어진다니, 살아있는 것이 무섭게 느껴졌다는 게 그 시절에 한 생각이었다고 한다. 약 30년이 흐른 지금, 소녀는 ‘메멘토 모리’(죽는다는 것을 기억하라)를 비유하는 작업으로 세계적 명성을 얻고 있는 사진 작가가 됐다.

서울 중구 회현동에 위치한 금산갤러리에서 안 작가의 개인전 ‘On Gravity(온 그래비티):방향과 좌표’가 최근 시작됐다. 금산갤러리 주 전시장과 옆 윈도우 갤러리 두 전시장에서 사진 작품 약 40점을 선보인다.

전시장에 들어서면 공중에 떠 있는 사과, 커다란 바위, 사람 등 평범한 것들을 주인공으로 하면서도 독특한 풍경으로 보이는 사진 작품들이 보인다. 평범한 일상 배경 사진 위에 사과나 바위 등이 공중에 둥둥 떠 있다. 마치 합성사진처럼 보이지만, 실은 아니다. 합성 기술도, 인공 조명도 사용하지 않은 아날로그적 수작업 노동으로 만들어진 실제 풍경이다. 작가의 부탁을 받은 가족들이 사과를 공중에 던지면 안 작가가 고속카메라로 숱한 사진을 찍는다. ‘몇장을 찍느냐’는 질문에 “세볼 수 없어 답을 하기 어렵다” 할 정도로, 쉼없이 셔터를 눌러 수많은 사진들을 찍고, 그 가운데 작품이 될 한 장을 고르는 것이 그가 1년 내내 하는 일이다. 그렇게 사과를 던지고, 돌을 던져서, 때로는 스스로 뛰어올랐다 착지하는 자신의 모습을 초고속 카메라로 찍는다. 이들의 숙명은 모두 중력에 이끌려 지면으로 떨어진다는 사실이다.

그는 이 작업 과정을 ‘미분’한다고 표현한다. 삶은 수학적으로는 기억조차 나지 않을 모든 삶의 순간을 적분한 것이기에, 거꾸로 그가 포착하는 순간은 시간이라는 단위로 흘러가는 삶을 미분하는 과정이자 결과물이다. 전시장에서 만난 그가 말했다.

“고속사진, 저속사진을 구분하는 기준이 뭘까 궁금했다. 인간의 눈이 인지하는 속도보다 빠른가 느린가라고 하더라. 우리가 가지고 있는 기억을 사진을 찍어 남기고, 중력으로 떨어지는 그 불가역적인 현상들 속에서 우연히 만들어진 위치의 아름다움을 발견하고 기념하고 싶었다.”

안 작가가 이번 전시에 남긴 작가노트에는 엄마에게 ‘더는 자라고 싶지 않다’고 했던 날의 기억을 상세히 적어두었다.

“그저 중력에 이끌려 바닥, 그러니까 지구 중심을 향해 떨어져야 하는데 그것을 ‘자유낙하’라고 부르는 것은 부당하다고 생각했다”는 그는 “떨어지는 물체의 입장에서는 그것에 저항할 방법 없이 어딘가에 부딪힐 때까지 낙하해야만 하는 것을 어째서 ‘자유’라고 부른단 말인가”라고 썼다.
왼쪽부터 무제 #091, 더 템페스트(The Tempest) #001
“당시에는 알 수 없었지만, 그날의 기억이 어딘가에 남아있었던 건지, 그 무렵부터 다른 사람들이 의미있다고 말하는 많은 것들이 시시했다. 살아가는 것은 저항이 무의미하게 물건이 중력에 의해 땅에 떨어지듯 현상의 끝을 향해 가는 과정이라고 생각하니 그때그때 재미있는 것을 찾아 할 뿐 어떤 것에 큰 의미를 두고 그것을 지속하기가 쉽지 않았다. 실제로 많은 일들이 노력보다는 운과 우연에 좌우되었고 노력이란 단지 뒤돌아보았을 때 후회를 남기지 않기 위해 필요한 것이었다.”
‘죽음을 기억하라’며 득도한 이 소녀에게 약간은 회의적 태도가 남아있었기 때문일까. 이번에 전시되는 작품 속 대상들은 흩날리듯 가벼워 보인다. 매년 팔당댐에서 가장 많은 방류량인 초당 1만톤이 쏟아져 나올 때 찍은 것이라는 물방울들(‘더 템페스트’ 연작)도, 카메라와 눈을 마주친 새(‘무제 #091’)도, 새의 깃털들(‘어 윙 #01’)도 세상에 던져지고 흩날려지는 모습이 인상적이다.
자화상 연작에 등장하는 안준 작가의 뒷모습. 금산갤러리 제공
고속 사진으로 초현실적 순간을 포착한 안 작가 특유의 독특한 풍경사진들은 일찌감치 세계의 주목을 받았다. 특히 ‘Self-Portrait(셀프 포트레잇·자화상)’연작(2008∼2013년) 속 그의 몸과 마음은 죽음에 대한 두려움 따위는 없는 듯이 가벼워 보인다. 광화문 KT 옥상에서 뛰어내리는 듯한 여성의 뒷모습처럼 찍힌 사진, 높이를 가늠할 수 없는 고층빌딩에 위태롭게 앉아있는 사진 등이 그렇다. 실은 발코니가 있다거나 옥상의 넓은 면 위에 올라가 전혀 위험하지 않은 상태에서 허가를 받고 찍은 사진 작품들이다. 아래에서 위를 올려다보는 카메라 각도를 취하는 등의 기법을 동원해 사람이 건물 밖으로 떨어지는 것처럼 위태롭게 보이게 하거나, 넓은 면적이 아닌 위험한 좁은 벽 위에 올라 서 있는 것처럼 착시현상을 일으킨다. 미국 파슨스 사진학과에 재학 중이던 때 작업한 이 작품들로, 2013년 영국 ‘브리티시 저널 오브 포토그라피’에 주목해야 할 사진작가 20인으로 선정됐다. 같은 해 홍콩 ‘사우스 차이나 모닝 포스트’에 주목해야 할 아시아 작가 5인으로 뽑혔다. 영국 가디언, 미국 포린폴리시, 폭스뉴스, 독일 슈피겔, 프랑스 리베라시옹 등 세계 여러 매체의 주목을 받았다. 2019년 파리포토(Paris Photo)에 참가해 파리포토 파트너사인 JP모건이 선정하는 하이라이트인 ‘큐레이터스 초이스’에 선정되기도 했다.

그는 자신의 작품들을 ‘중력에 순응하거나 역행하는 여러 현상의 찰나’라고 설명한다. 단지 중력으로 인해 아무 저항 없이 떨어질 수밖에 없는 운명을 비탄하는 듯하면서도 기어코 역행하는 순간, 중력을 딛고 솟구쳐 오르는 순간도 촬영한다. 이번 전시에서도 볼 수 있는 위로 솟구치는 불꽃, 소용돌이, 새의 날갯짓이 그렇다. 상승하는 이미지들도 빠뜨리지 않고 모아 보여준다.

같은 연작의 다른 이미지들이 지구 반대편 유럽 스위스 취리히 크리스토퍼 귀 갤러리에서도 동시에 열리고 있다.

10월 22일까지.

김예진 기자 yejin@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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