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재현의 한발 멀리서] 화천대유, 도둑맞은 자영업자의 절망

박재현 콘텐츠랩부문장 2021. 9. 30. 20:18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경향신문]

29일 오전 압수수색이 진행 중인 경기도 성남시 화천대유자산관리 사무실 입구 모습. 연합뉴스

“에잇, 다 때려치우고 장사하면 되지.” 쥐꼬리 월급에 아니꼽고 치사하고 때로는 억울하더라도 토끼 같은 자식들을 위해 분을 삭이던 월급쟁이들이 내뱉던 말이었다. 장사는 ‘역전의 한 방’을 모색하는 인생의 피난처 같은 것이었다. “아무리 그래도 몸이 부서져라 열심히만 하면 굶기야 하겠어”라며 불안한 미래의 바닥을 가늠하기도 했다.

박재현 콘텐츠랩부문장

이제 이런 말들을 사용할 수 없게 됐다. 최근 서울에서 20년 넘게 맥줏집을 운영하던 50대 자영업자가 극단적 선택을 했다. 지인들은 “거의 가게에서 먹고 살다시피 하며 일만 했다”고 전했다. 그래도 가게 월세와 직원 급여를 감당하지 못했다. 지난 12일 전남 여수에서 치킨집 ‘사장님’이, 지난 1월 대구 닭꼬치집 ‘사장님’이, 8월엔 경기 성남시 주꾸미 식당 ‘사장님’이 세상을 떴다.

카드수수료, 배달수수료, 치솟는 임대료 등 버는 돈보다 나가는 돈이 많다. 결국 빚으로 견딘다. 한국은행 통계를 보면 올해 2분기 자영업자 대출은 1년 전보다 14%(26조6000억원) 늘어난 858조4000억원이었다. 거리 두기 피해가 컸던 여가서비스업(20%), 도·소매업(14%)에서 대출 증가율이 높았다.

안타깝지만 자영업자가 감내해야 하는 상황이기만 할까. 추석합본호로 발행된 주간경향 1445호를 보면 “감염병의 비극이 아니라 정책의 비극”이었다. 미국, 캐나다, 프랑스, 일본에서 자영업자들은 수억원의 지원금을 받아 위기를 벗어날 수 있었다. 미국 애틀랜타에서 직원 12명을 둔 일식당 운영자는 지난해부터 2차례에 걸쳐 급여보호프로그램(PPP) 12만달러, 올해 상반기 카운티 지원금(1만5000달러), 주정부 지원금(5만달러), 식당회생자금(RRF) 6만달러 등 24만5000달러, 한화로 2억8500만원을 받았다. 같은 기간 충남 천안에서 직원 11명의 대형 카페 사장님이 받은 지원금은 2200만원으로 10분의 1도 되지 않았다.

사정이 이렇지만 홍남기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은 지난 6일 국회에서 “그들의 고통과 타격에 비하면 정부 지원이 만족스럽지 않다”면서도 “나라 곳간이 비어가고 있다”고 했다. ‘사람이 먼저’라는 국정 캐치프레이즈로 집권한 정부의 부총리 말이 맞나 싶다. 추석연휴 직전인 17일 정부가 국무회의에서 ‘소상공인 손실보상법’ 시행령 개정안을 의결했지만 보상 수준은 ‘생색내기’ 가능성이 농후하다. 보상 대상이 매우 좁고, 소급 적용을 하지 않아 7월7일 법 공포일 이전에 입은 손실은 보상받을 수 없다.

“지금 이 자리에 계신 여러분들은 모두 감당할 수 없는 빚을 지고 삶의 벼랑 끝에 서 계신 분들입니다.”

세계적인 화제작 넷플릭스 드라마 <오징어 게임>을 보며 자영업자들은 자신들의 현실이 오징어 게임 참가자들의 모습과 똑같다고 말한다. 그만큼 지옥 같은 현실이 반영돼 있기 때문이다. 주인공 성기훈(이정재)도 해고를 당한 뒤 치킨집·분식집 등 자영업에 실패하고 4억원의 빚을 지고 있다. 게임이든 장사든 탈락은 곧 ‘사망선고’나 다름없다.

상황은 절박하고 정부를 향해 “살려달라”고 절규하는 자영업자들은 이번주 의외의 등장인물에 할 말을 잃고 있다. 대장동 개발 특혜 의혹의 핵심인 화천대유에서 6년간 일한 곽상도 의원 아들은 회사를 관두면서 50억원을 받았다. 그는 “저는 너무나 치밀하게 설계된 오징어 게임 속 ‘말’일 뿐”이라며 “설계자 입장에서 저는 참 충실한 말이었다”고 주장했다. 지금껏 자신이 게임 속의 말인 줄 알았던 자영업자들은 허탈해할 수밖에 없다.

박완서 선생이 1975년 쓴 ‘도둑맞은 가난’이란 단편소설이 있다. 가난 때문에 가족을 잃고 봉제공장에서 일하는 주인공은 도금공장에 다니는 남자(상훈)와 산동네 단칸 셋방에서 동거하며 악착같이 가난에 맞선다. 알고 보니 상훈은 아버지의 뜻에 따라 가난을 체험하려는 부잣집 아들이었다. 상훈은 “좋은 경험을 시켜줘 고마웠다”며 “아버지가 의외로 깊은 관심을 보이시고 집에 데려다 잔심부름이라도 시키다 쓸 만하면 어디 야학이라도 보내자고 하시잖아. 좋은 기회야. 이 기회에 이런 끔찍한 생활을 청산해”라고 말한다. 상훈이 건넨 돈을 내동댕이치고 남자를 내쫓은 주인공은 “나는 우리가 부자한테 모든 것을 빼앗겼을 때도 느껴 보지 못한 깜깜한 절망을 가난을 도둑맞고 나서 비로소 느꼈다”고 독백한다.

지금 자영업자들은 소설 속 아버지 같은 정부와 드라마 속 말을 자처하는 아들들이 가득한 사회에서 ‘깜깜한 절망’을 느끼고 있다.

박재현 콘텐츠랩부문장 parkjh@kyunghyang.com

Copyright © 경향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