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프간에서 '미라클'을 보다

한겨레 2021. 9. 30. 18: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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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명윤의 환상타파]

[환상타파] 전명윤|아시아 역사문화 탐구자

첫 국외여행을 하던 1996년, 인도 뭄바이의 허름한 숙소에서 대만 여행자를 만난 적이 있다. 일반적으로 아시안 여행자들은 영어가 능숙하지 않기 때문에 서양인 여행자들과 잘 어울리지 못한다. 그 덕에 평소에는 서로 으르렁대기 바쁜 한·일 여행자들도 외국에서는 일종의 순망치한의 처지가 돼 금세 친해지곤 한다.

대만 여행자는 드물다. 지금도 흔치 않은데, 그때는 더 그랬다. 머물던 숙소에 단둘뿐인 아시안이다 보니 어느새 밥도 같이 먹으러 다니는 사이가 됐다. 그녀의 이름은 메이였는데 같이 다닌 지 사흘째쯤 대뜸 정색하더니, ‘대관절 그때 왜 우리나라를 그렇게 배신한 거야?’라고 따지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무슨 말을 하는지 몰랐다. 메이는 자신이 하는 말의 의도를 모르는 내가 더 야속한 듯했다.

메이는 4년 전 한-중 수교 당시 한국의 처신에 대해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난감했다. 24살의 나는 내가 한 일이 아니라며, 한국에 돌아가면 꼭 청와대에 항의하겠다고 너스레를 떨었지만, 그녀의 분노는 쉽게 사그라지지 않았다. 이후로도 10여년가량, 대만 여행자를 만나면 비슷한 항의를 듣곤 했다.

1992년 8월24일 한국은 중국과 수교를 했다. 그 전까지는 중국이라 부르지 않고 중공이라 부르던, ‘아아 잊으랴 어찌 우리 이날을’로 시작하는 노래의 2절쯤에 등장하는 ‘거대 빌런’이 어느 날 갑자기 한국의 친구가 돼버렸다.

그전까지 자유중국이라 부르며 한국의 식민지 시대부터 한국전쟁, 그리고 경제개발 시기까지 막역한 친구였던 대만과는 그날로 단교 조치가 이루어졌다. 서울 명동의 중국대사관에서 대만 국기인 청천백일기가 내려가고 오성홍기가 올라갔을 때, 그 아래서 오열하던 화교들의 얼굴이 티브이로 방영됐다. 한국이 심했다. 한-중 수교는 당시 꽤 비밀리에 진행됐다고 한다. 대만 쪽에서도 정황을 파악하고 수교 발표 전날까지 한국 외교부에 문의했지만, 정부의 답변은 그런 일이 없다였다.

윤봉길 의거 이후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물심양면으로 지원했고, 카이로 선언을 앞두고 한국의 독립을 강력히 주장해 선언문에 ‘한국의 독립’ 문구를 넣은 건 장제스 중화민국 총통의 노력이었다. 그리고 겨우 정부를 수립한 대한민국을 최초로 방문한 국가원수급 지도자도 장제스였다. 사실 대한민국이라는 나라의 탄생에 중화민국이 끼친 영향은 적다고 할 수 없다.

나중에 자료를 조사하면서 알게 된 일이지만, 1992년 그 배신 이후 대만에서 불어닥친 일종의 ‘혐한’은 엄청났다고 한다. 요즘 중국에 가면 영어깨나 한다는 중국인들은 항상 공자를 왜 한국인이라 주장하냐고 항의하는데, 이 이야기도 대만의 한 타블로이드 매체가 당시 혐한 분위기 속에서 악의적으로 처음 보도한 게 물 건너 중국까지 흘러들어간 탓이다. 그 덕에 요즘은 꽤 많은 중국인이 나 같은 사람을 보면 은근히 시비를 걸어오는 주요 소재가 됐다.

나라의 힘이 약했기 때문이건 아니건, 한국이 대만에 신의를 지키지 못한 건 부정할 수 없다. 그리고 오랜 기간 한국은 밖에서 보기에 그리 신의가 있는 나라는 아니었다. 나는 이런 한국의 모습에 익숙했다.

아프가니스탄은 한국에 참 묘한 나라다. 우리가 납치된 국민을 구하기 위해 국가적 노력을 본격적으로 기울인 기억도 2007년의 아프가니스탄과 맞닿아 있고, 특별기여자로 한정했지만 그들을 버려두지 않고 데려오는 신의를 보여준 것도 2021년 그 땅에서 비롯한 일이다.

작전명 ‘미라클’은 부를 때마다 손발이 오그라드는 경향은 있으나 그간 우리의 무책임하기만 했던 과거를 상기한다면 이는 다른 의미에서 미라클이 맞다. 1980년대부터 그토록 목놓아 부르던 선진 사회는 경제적인 성공만으로 이룰 수 없다. 그에 걸맞은 국제적인 책임이 따르게 마련인데, 그런 점에서 한국은 이제 선진국으로 가는 첫걸음을 뗀 셈이다. 국격이란 책임지는 모습에서 시작되는 것이다. 우리의 책임이 늘어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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