셋째 이모, 박영애

한겨레 2021. 9. 30. 18: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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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창]

[삶의 창] 김소민|자유기고가

우리 셋째 이모 박영애(65)는 어릴 때 춤을 췄다. 예중, 예고를 나왔는데 돈이 없어 대학 입시를 치르지 못했다. 이모는 그 이후 중고등학교 동창들을 만난 적이 없다. 23살에 결혼해 아들, 딸을 낳았다. 아이들이 중학교에 들어간 뒤 쭉 돈벌이를 했다.

이모는 생활정보지를 뒤져 ‘디엠(DM) 발송 업체’에 취직했다. 중년 여성 4~5명이 팀을 이뤄 봉투를 접은 뒤 책, 잡지 따위를 넣고 주소지를 붙이는 작업을 했다. 이모가 첫 출근을 한 날 싸움이 붙었다. 초짜인 탓에 속도가 떨어지자 한 직원이 “그것도 제대로 못하냐” 싫은 소리를 했다. 그러자 다른 직원이 “너는 처음부터 잘했냐”고 대거리했다. 이모는 좌불안석이었다. 그 사무실에서 이모는 ‘신의 손’들을 보았다. 50대 초반부터 최고령 78살까지 경력 10년차 이상인 달인 여자들은 따로 팀을 꾸려 ‘웃게도리’(당시 디엠 작업장에서 쓰던 은어)를 했다. 발송업의 특공대쯤 된다. 대량으로 작업물을 받아 단시간에 해치우는 팀이다. “귀신이야. 손이 안 보여.” 이모는 ‘웃게도리’ 팀엔 끼지 못했다. 3년 만에 목디스크에 걸렸다. 왼손으로 봉투를 열고 오른손으로 책을 잡아 넣는 일을 반복하다 보니 상반신 오른쪽에 무리가 왔다. 이모 돈으로 석달 치료를 받아야 했다.

그 뒤 어린이집에 취직했다. 아이들 밥을 짓는 일이었다. 아이들이 등원하자마자 먹을 아침을 차리고 오전 간식을 내면 점심이 왔고 곧바로 오후 간식까지 만들어 둬야 했다. 그 사이사이 김치를 담그고 다음날 쓸 재료를 다듬었다. 원장은 오전 근무 시간만 따져 시급을 줬다. 이모가 슬펐던 순간은 아이들 생일 때였다. 부모님들이 케이크를 사 보내 다들 나눠 먹었는데 이모에겐 아무도 먹어보란 말을 하지 않았다. 디스크가 도져 그만뒀다.

대학에 납품하는 샌드위치 만드는 곳에서도 일했다. 아침 9시부터 오후 5시까지 일하고 주급을 받았다. 임금을 떼였다. 지하철 타고 다니며 택배일도 했다. 대기하는 시간이 고역이었다. 서너 시간씩 벤치에 앉아 어디로 갈지도 모른 채 기다렸다. 이모는 이 일의 임금도 떼였다. 대학교 구내식당에서도 일했다. 컵과 수저를 닦아 정리했다. 컵 50개씩 모아 찬장에 올리는데 “장난이 아니었다”. 허리가 끊어질 듯했다. 이모가 그만두겠다고 하니 학교 쪽에서 교수식당으로 보내주겠다고 했다. 교수식당에선 유니폼으로 조끼도 나오고 컵 숫자도 적다고 했지만 이모는 디스크가 도질까 봐 거절했다.

백화점에서도 일했다. 에어컨 나오지 난방 되지 천국이겠거니 했는데 아니었다. 이모는 이때가 제일 힘들었다고 했다. 하루 종일 앉지 못하는 건 참을 수 있었다. 괴로운 건 감시와 모멸감이었다. “표정이 너무 무뚝뚝하다.” 친절도를 평가해 회의시간에 면박을 줬다. 허리가 아픈 이모는 하루 종일 미소 지은 채 서 있어야 했다. 이모는 장사도 했다. 샤프나 지우개도 팔고 아동복도 팔았다. 남대문에서 도매상을 할 때는 새벽 5시부터 일했다. 이모가 이 모든 노동을 한 까닭은 물론 돈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게 다는 아니었다. “한번 사는 인생 진짜 열심히 살고 싶었어.”

이모가 일한 곳은 대개 5인 미만 업체였다. 근로기준법 같은 건 남의 세상 일이었다. 국민의힘 윤석열 대선 예비후보의 말을 인용하자면 “인도도 안 하고 아프리카에서나 하는 손발 노동”으로 그는 두 아이를 어른으로 키웠다. 그의 ‘손발 노동’이 없었다면 이 가정은 무너졌을 거다. 밖에서 무슨 일을 하건 가사노동은 상수였다. 제사나 명절이 돌아올 때면 3일 전부터 이모는 속이 울렁거렸다. 집안일이건 바깥일이건 그의 일은 일 취급 받지 못했다. 그는 노동자의 권리를 인정받지 못했고, 시집에서는 ‘그냥 노는 여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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