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노래가 시가 되는 건 아니다

2021. 9. 30. 1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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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노래 한 편, 노랫말 한 구절은 평생 가슴에서 리메이크되며 삶을 어루만진다. 한 줄의 가사가 삶의 위안이 되고 일상을 치유하기도 한다.

모든 시가 노래가 될 수 있지만, 모든 노래가 시가 되는 건 아니다. 가요계를 양분하고 있는 트로트(성인가요)와 K-Pop은 가수의 나이, 팬, 음반(음원) 제작이나 음악적 테크닉에서 큰 차이가 있지만 무엇보다 노랫말에서 많이 다르다. 시, 또는 시적 감성을 K-Pop에 접목하긴 어렵다. 그렇다고 “요즘 노래 가사는 도대체 무얼 말하는 건지 모르겠어”라고 폄하하다가는 꼰대 취급 받기 십상이다. 노래는 수용자에게 어떤 식으로든 위안과 기쁨을 주는 것이니까.

트로트 가사는 퇴행적이거나 감정과잉이거나 무의미하다는 비판을 가끔 받는다. 하지만 ‘알뜰한 그 맹세에 봄날은 간다’라고 한 <봄날은 간다>나, ‘첫 사랑 그 소녀는 어디에서 나처럼 늙어갈까’라고 노래한 ‘낭만에 대하여’ 같은 가슴 적시는 시노래도 적지 않다. 

전형적 트로트도, K-Pop도 아닌 중간 지점에는 작곡 작사 가창 능력을 겸비한 빼어난 싱어송라이터나 뮤지션들이 만든 노래가 있다. 대중가요라 칭하기엔 고상하고, 성인가요라고 하기엔 미안한 노래들이다. 주옥 같은 가사들은 대체로 이런 노래들에서 찾아진다.

노래와 시는 본디 같은 뿌리다. 시가 소리 나지 않는 노래라면, 노래는 말하지 않는 시다. 곡조가 노래의 얼굴이라면 가사는 노래의 가슴이다.

어떤 노래들이 아름다운 가사를 품은 가요일까. 누구나 자신만의 18번이 있겠지만 시인들에게 물어보는 게 조금은 보편타당하지 않을까.

시인들은 어떤 노랫말을 최고로 쳤을까. 좀 오래 전 이야기지만 계간 ‘시인세계’가 2004년 봄호에 ‘시인들이 좋아하는 대중가요 노랫말’ 특집을 게재한 적이 있다. 김춘수, 황금찬, 홍윤숙, 김광림, 정진규, 이근배, 신달자 같은 원로부터 안도현, 함민복, 장석남, 이산하, 이병률 같은 중진이나 젊은 시인들까지 100명에게 물었다. 세 곡씩을 골라달라고 했다.

압도적으로 가장 많은 표를 얻은 노래는 <봄날은 간다>였다. 1950년 한국전쟁 때 대구에서 백설희가 발표했다. 손로원이 쓰고 박시춘이 작곡했다. 아마도 한국 대중가요 사상 최근에 이르기까지 가장 많은 가수들이 리메이크한 노래로 짐작된다. 허진호 감독의 동명 영화에 삽입된 가수 김윤아의 동명 노래도 앞 순위에 들지는 않았으나 시인들이 좋아한 노랫말로 꼽혔다.

한국전쟁 중에 손로원이 작사하고 박시춘이 작곡하고 백설희가 부른 ‘봄날은 간다’는 가장 많은 가수들이 리메이크한 노래다. 백설희의 히트송을 모은 음반.

이어 2~5위는 <킬리만자로의 표범 > <북한강에서> <사랑 그 쓸쓸함에 대하여> <한계령>이 낙점을 받았다.

<킬리만자로의 표범>은 시로 따지면 장편 서사시라고 할 만큼 긴 노래인데 드라마 작가이자 작사가 양인자가 노랫말을 썼고, 남편 김희갑이 곡을 붙였다. 가사의 모티브는 헤밍웨이의 소설 ‘킬리만자로의 눈’에서 왔다. 이 소설은 “킬리만자로 서쪽 정상 가까이에는 미라의 상태로 얼어붙은 표범의 시체가 있다. 그 높은 곳에서 표범이 무얼 찾고 있었는지 설명해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라는 구절로 시작한다.

<북한강에서를> 작사 작곡 노래한 정태춘은 한국의 독보적 ‘가객’이자 ‘외로운 구도자’요, ‘투쟁하는 광장의 깃발’이다. ‘새벽강에 홀로 나와 그 찬물에 얼굴을 씻으면’ 속세의 어지러운 욕망과 관계가 물길 따라 흘러간다.

<사랑, 그 쓸쓸함에 대하여> <한계령>은 양희은의 청아한 목소리로 사랑을 받았다. 70년대 암울했던 청춘을 보낸 이들은 양희은의 노래에 빚지고 있다.  <사랑, 그 쓸쓸함에 대하여>는 그가 작사했고, <한계령>은 ‘시인과 촌장’의  하덕규가 썼다. 고은 시인은 장시 ‘만인보’에서 ‘양희은과/양희은의 비겁할 줄 모르는 통기타/치사할 줄 모르는 노래/이 셋이 시대의 자유를 꿈꾸었다 모두와 함께’라고 했다.

6~10위는 <그 겨울의 찻집> <내 하나의 사람은 가고> <서른 즈음에> <가시나무> <아침이슬>이었다.

2008년 조용필 40주년 기념콘서트 포스터. 노래 ‘킬리만자로의 표범’을 대표곡으로 내세웠다. 드라마 작가이자 작사가인 양인자가 헤밍웨이의 동명 소설에서 따왔다.

작사가를 기준으로 가장 많은 곡이 뽑힌 이는 5곡씩 선정된 정태춘과 송창식이다. 정태춘은 <북한강에서> <시인의 마을> <애고 도솔천아> <떠나가는 배> <탁발승의 새벽 노래>가, 송창식은 <나의 기타 이야기> <선운사> <새는> <사랑이야> <우리는>이 뽑혔다. 이어 양인자가 <서울서울서울> <킬리만자로의 눈> <그 겨울의 찻집> <큐> 등 4곡, 하덕규가 <한계령> <가시나무> 2곡이다.

노래를 부른 가수를 기준으로 하면 단연 송창식이었다. <나의 기타 이야기> <선운사> <새는> <사랑이야> <우리는> <상아의 노래> <푸르른 날> <그대 있음에> <고래사냥> 9곡이 꼽혔다. 송창식 노래 중에는 문인의 시가 3곡 들어갔다. 서정주(푸르른 날), 김남조(그대 있음에), 최인호(고래사냥)다.

이어 정태춘이 위의 4곡에 <봉숭아>를 포함해 6곡, 조용필이 위의 양인자의 4곡에 <허공>을 포함해 5곡, 양희은이 <사랑, 그 쓸쓸함에 대하여> <아침이슬> <한계령> 3곡이다.

시인들이 좋아하는 가사는 어느 정도 감상적 측면이 강한 노래들이 많았다. 이는 감정이 보다 절제돼야 하는 시와의 차이점일 것이다. 대중가요에 가장 많이 등장하는 사랑과 이별 타령이나 정치적 성향이나 메시지가 강한 노래는 별로 꼽히지 않았다. 대체로 사색적이고 일상의 감정이 섬세하게 표출된 노랫말이 사랑을 받았다.

21세기로 넘어와 발표된 노래 중에는 어떤 노래들이 꼽혔을까. 앞의 조사 10년 후인 2014년 카카오뮤직과 문학과지성사가 한글날을 맞아 2000년 이후 발표된 노래를 대상으로 시인들에게 물었다. 김행숙 김소연 이민하 등 비교적 젊은 시인 14명에게 설문지를 돌려 7곡을 발표했다.

이소라의 곡 <바람이 분다>와 요조의 <우리는 선처럼 가만히 누워>가 공동 1위를 차지했다.

시인 이민하는 <바람이 분다>에 대해 “사소한 노랫말에서 오는 감동은 그것이 몸의 언어일 때 가능하다. 몸에서 맺혀진 눈물처럼 종이 위에 맺혀진 글자들이 새벽의 어둠을 통과하는 중이다”라고 했다.

시인 김소연은 <우리는 선처럼 가만히 누워>에 대해 “혼자 누워서, 함께 누워 듣는 것만 같은 판타지가 필요할 때엔 이 노래를”이라는 추천사를 남겼다.

선정된 7곡은 두 노래 외에 김광진 <편지>, 브로콜리너마저 <보편적인 노래>, 델리스파이스 <고백>, 김윤아 <봄날은 간다>, 루시드폴 <물이 되는 꿈>등 비교적 대중에 널리 알려지지는 않았으나 열렬한 팬층을 지닌 인디 뮤지션 노래가 대다수였다.

◆ 한기봉 전 언론중재위원

한국일보에서 30년간 기자를 했다. 파리특파원, 국제부장, 문화부장, 주간한국 편집장, 인터넷한국일보 대표, 한국온라인신문협회 회장을 지냈다. 국민대 언론정보학부 초빙교수로 언론과 글쓰기를 강의했고, 언론중재위원과 신문윤리위원을 지냈다. hkb821072@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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