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장 변화 없이 '통신선 복원' 카드로 주도권 흔들려는 김정은
[경향신문]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최고인민회의 시정연설에서 이중기준·대북 적대시정책 철회라는 기존 입장을 고수하면서 남측 정부가 요구해 온 남북통신연락선 복원 카드를 꺼냈다. 임기가 8개월 밖에 남지 않은 문재인 정부가 미국 정부의 대북 정책전환에 적극 나설 것을 압박하며 남북과 북·미 관계에서 주도권을 확보하려는 의도가 더 명확해졌다는 평가가 나온다.
30일 조선중앙통신 보도에 따르면 김 위원장은 전날 시정연설에서 문재인 대통령의 종전선언 제안에 대해 “편견적 시각과 불공정한 이중적인 태도, 적대시 관점과 정책들부터 먼저 철회(하라)”는 입장을 재천명했다. 지난 24∼25일 김여정 노동당 부부장과 리태성 외무성 부상이 담화를 통해 밝혔던 종전선언의 선결조건을 직접 언급함으로써 ‘양보할 수 없는 조건’임을 분명히 한 것이다.
김 위원장은 현 한반도 정세를 “불안하고 엄중한 경색 국면”이라고 평가한 뒤 그 원인으로 “미국과 남조선의 도를 넘는 무력증강, 동맹군사활동”을 꼽았다. 북한이 이달에만 신형장거리 순항미사일(11∼12일), 단거리 탄도미사일(15일), 극초음속 미사일(28일) 등 3차례나 시험발사를 하며 군사적 긴장을 조성한 책임은 회피하고, 남측과 미국에 책임을 전가한 것이다. 그러면서 “국가방위력 강화는 주권국가의 최우선적 권리”라며 지난 1월 8차 당대회에서 밝힌 핵기술 고도화, 핵무기 소형경량화 등 ‘국방 강화 목표’ 관철을 지시했다. 한·미연합훈련 같은 적대시 정책이야말로 남북, 북·미 관계를 가로막는 걸림돌이라고 지적하고, 이중기준을 내세우며 자신들의 국방력 강화 움직임을 막지말라고 요구한 것으로 해석된다. 김 위원장이 “남측은 북한의 도발을 억제해야 한다는 망상과 위기의식, 피해의식에서 빨리 벗어나라”고 말한 것도 자신들의 국방력 강화 행위를 도발로 규정하지 말라는 이중기준 철회 요구와 상통한다.
김 위원장은 이중기준과 대북적대시 정책의 철회를 직접 요구하면서 남북연락통신선 복원이라는 유화책을 꺼냈다. 표면적으로는 남측 정부의 요구에 부응한 것처럼 보이지만 남측의 의지를 시험하고 남북 관계에서 주도권을 쥐려는 의도라는 분석이 나온다. 북한은 이전에도 정치적 필요에 따라 통신선 복원과 단절을 반복해왔다. 지난해 6월 남측의 대북 전달 살포를 문제삼아 통신연락선을 일방적으로 단절했다가 13개월 만인 지난 7월 재개했고, 8월에는 한·미연합훈련을 비난하며 다시 끊어버렸다. 이 때문에 통신선 복원 자체만으로는 남북관계에서 큰 의미를 부여하기 어렵다는 시각도 있다.
정성장 세종연구소 북한연구센터장은 “남북통신선이 복원되고 남북 간에 대화 분위기가 조성되겠지만 북한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근본적인 문제’(한·미연합훈련과 한국의 미국 첨단무기 도입 중단 요구 등)에서 양측의 이견이 좁혀지지 않는다면 관계 개선에 한계가 있을 수도 있다”고 전망했다.
김 위원장이 조 바이든 정부의 대북정책에 대해 처음으로 밝힌 이날 입장도 기존 북한의 태도와 크게 다르지 않다. 그는 “역대 미 행정부들이 추구해 온 적대시 정책의 연장에 불과하다”면서 바이든 정부가 대화만 제의하고 적극적 협상책을 내놓지 않는 점을 비판했다. 미국의 선제적 조치 없이는 대화 제의에 응할 의사가 없음을 재차 밝힌 것으로 평가된다. 이에 따라 2019년 ‘하노이 노딜’ 이후 단절된 북·미 대화의 재개 가능성은 당분간 기대하기 어렵다는 전망도 나온다.
또 문 대통령이 북·미 협상 재개를 위한 적극적인 역할에 나서야 한다고 간접적으로 압박하면서 한·미 관계의 틈을 만들려는 의도도 엿보인다. 통신선 복원을 계기로 문재인 정부에 종전선언, 남북정상회담 같은 카드를 내보이며 남측에 미국의 적대시 정책과 선을 긋고 독자적인 남북 관계 노선을 택하라고 요구할 가능성도 제기된다. 내달 10일 당 창건일을 전후로 추가 무력 시위에 나설 수도 있다.
양무진 북한대학원대학교 교수는 “북한의 강온전략이 진정성을 보이지 않거나 남측의 일방적 태도변화 요구, 대화의 재개와 중단 위협 반복 등으로 나타날 경우 신뢰회복보다 부작용이 크다는 점에서 남북관계에서 중요한 분기점에 다다른 것으로 판단된다”고 했다.
박은경 기자 yama@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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