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리' '많이' 압박 속 스러진 삼성전자서비스 노동자..세탁기 수리 중 감전 사망

이혜리 기자 2021. 9. 30. 16: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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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금속노조와 삼성전자서비스지회 노조원들이 30일 서울 중구 정동 사무실에서 지난 28일 세탁기를 수리하던 중 감전으로 사망한 윤승환씨의 사고에 대한 삼성 책임을 묻는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윤씨는 사고 당일 다른 수리기사에게 ‘아직 2건 밖에 못했다’는 말을 한 것으로 전해졌다. 이준헌 기자


‘세탁기에서 전기가 느껴진다’는 접수를 받고 삼성전자서비스의 가전제품 수리기사 윤승환씨(44)가 서울 양천구 한 아파트에 방문한 것은 지난 28일 오후 1시30분쯤이었다. 윤씨가 수리 업무를 시작하기 위해 전산 등록을 한 시각은 오후 1시41분, 감전돼 쓰러진 윤씨를 보고 고객이 119에 신고한 때는 오후 1시54분이다. 불과 13분 안에 사고가 발생했고, 윤씨는 병원으로 옮겨졌으나 숨을 거뒀다.

금속노조는 30일 기자회견을 열고 이번 사고 배경에 삼성전자서비스의 실적 압박과 미흡한 안전대책이 있었다고 밝혔다. 기자회견에는 윤씨와 삼성전자서비스 디지털양천센터에서 함께 일했던 노동자들이 참석했다.

금속노조에 따르면, 윤씨가 수리를 하러 간 고객 집은 세탁기가 베란다에 있었는데 세탁기를 움직이는 것이 쉽지 않을 정도로 공간이 협소했다. 아파트가 노후해 전기 차단기를 내릴 수 없었고, 작업을 하려면 세탁기 전선을 콘센트에서 빼야 하지만 콘센트는 손이 제대로 닿지 않는 안쪽에 있었다. 전선을 빼고 작업이 가능하도록 비좁은 공간에서 세탁기를 밀면서 이동해야 했다. 세탁기를 움직이는 과정에서 세탁기 뒷부분의 급수 밸브가 파손돼 물이 튀었고, 이로 인해 윤씨가 전기에 감전됐다는 게 노조 추정이다. 노조는 “사고 당시 혼자서 작업했던 상황이라 정확한 사고 원인은 추가 조사가 필요하지만, 사고 장소와 제품 위치 등을 확인한 동료 노동자들은 도저히 안전하게 작업할 수 없는 환경이었다고 지적했다”고 했다. 수리 노동자의 감전 사망은 전례를 찾기 어렵다. 윤씨는 8년 가량 근무한 숙련된 수리기사였다.

사고가 발생한 현장의 모습. 세탁기를 움직이기 어려운 비좁은 베란다 공간에서 윤승환씨는 혼자 수리를 해야 했다. 금속노조 제공
금속노조와 삼성전자서비스지회 노조원들이 30일 서울 중구 정동 사무실에서 지난 28일 세탁기를 수리하던 중 감전으로 사망한 윤승환씨의 사고에 대한 삼성 책임을 묻는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이준헌 기자


노조는 윤씨를 비롯한 수리 노동자들이 회사의 실적 압박에 시달려 위험한 상황을 감수하며 작업해왔다고 지적했다. 삼성전자서비스가 몇 건을 처리했는지를 말하는 ‘처리력’, 첫 방문 한번에 수리를 완료했는지를 말하는 ‘초도 수리율’ 등을 따져 등급을 매기고 진급 여부를 결정하는 상황에서 위험한 작업환경은 뒷전이 됐다는 것이다. 노조는 “사고가 발생한 날 윤씨와 통화한 동료는 윤씨가 스케줄이 밀려 심하게 압박을 받던 상황이었다고 증언했다”고 했다. 노조는 “윤씨가 8건의 수리를 배정받았지만 점심시간 통화 때 오전에 2건 밖에 처리하지 못했다고 얘기했다고 한다”며 “오후에 6건을 모두 처리하지 않으면 당일 실적을 다 채우지 못하는 상황에서 더 급하게, 위험한 상황이라도 뒤로 미루지 못하고 작업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라고 했다.

노조가 공개한 자료를 보면 삼성전자서비스 센터들은 하루에 9건을 처리하면 1만원, 11건을 처리하면 2만원을 주는 식으로 이벤트를 진행하고, 실시간으로 처리 현황을 공유하면서 “열외자가 많다. 처리력 집중해달라”는 식으로 기사들에게 공지했다.

윤씨와 함께 디지털양천센터에서 일했던 김문석 분회장은 “승환이가 죽기 전날에도 센터는 ‘초도 수리 실패 사유 회신 요청’이라는 메시지를 보냈다”며 “4월부터 업무량이 폭주하는 상황에서 고객과 센터는 빨리 수리하라고 독촉한다”고 했다. 그는 “승환이는 정말 열심히 일하고, 안전이라면 최우선으로 하는 친구였다. (이번 사고는) 삼성이 만든 시스템 때문”이라고 말하며 기자회견 도중 울먹였다.

수리기사들의 시간대별 처리 현황. 금속노조는 삼성전자서비스가 기사들에게 처리 실적을 메시지로 보내며 압박을 했다고 주장했다. 금속노조 제공
삼성전자서비스의 센터가 진행한 이벤트. 얼마나 많은 수리 건수를 달성했는지에 따라 돈을 주는 방식이다. 금속노조는 이처럼 기사들의 처리 실적을 압박하고 경쟁을 부추기는 분위기 속에서 윤씨가 사망하는 사고가 발생했다고 비판했다. 금속노조 제공


안전작업 매뉴얼이 부실하고, 2인 1조 작업을 의무화하지 않은 탓이 있다는 비판도 나왔다. 윤종선 삼성전자서비스 서울지회장은 “(윤씨가 사망한 현장은) 누가 갔어도 죽었을 것이고, 우리는 단지 운이 좋아서 살았을 뿐이라고 생각한다”며 “수리 서비스 노동자들이 다니는 작업 환경은 천차만별이고 제품도 수도 없이 많지만, 각각에 대한 작업 기초 매뉴얼을 만들지 않고 있다”고 했다. 윤 지회장은 “위험한 작업을 할 때 기본적으로 갖춰야 되는 기본 매뉴얼을 숙지하고 교육했었다면, 2명이 함께 작업했다면 이런 사고는 발생하지 않을 확률이 훨씬 높을 것”이라며 “회사는 안전하게 하라면서도 빨리, 많이 처리하라는 (모순적인) 이야기만 하고 있다”고 했다.

노조는 기자회견문에서 “충분한 안전조치가 되지 않은 작업환경, 안전작업을 위한 안전작업표준도 없고 교육도 이뤄지지 않은 상황, 밀려드는 콜을 빠르게 처리해야 한다는 압박이 문제”라며 “노동자 안전을 외면한 삼성으로 인해 11살과 2살 두 어린 자녀를 둔 노동자가 너무나 안타깝게 목숨을 잃었다”고 했다.

삼성전자서비스 측은 “직원이 불의의 안타까운 사고를 당해 회사도 황망하고 비통한 심정”이라며 “고인과 유족에게 깊은 애도를 전한다”고 밝혔다. 다만 사고 원인과 관련해서는 경찰 등의 수사 결과를 기다리고 이후 대책을 수립할 계획이다. 삼성전자서비스 관계자는 “대책을 수립하는 과정에서 노조 의견도 경청하고 검토하겠다”고 했다.

이혜리 기자 lhr@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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