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토록 감성어린 첩보물이라니.. '007' 뒤집은 '007'

라제기 2021. 9. 30. 15: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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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일 개봉 '007 노 타임 투 다이'
'007 노 타임 투 다이'에서 제임스 본드는 여전히 애스턴마틴을 운전하며 화려한 액션을 펼친다. 하지만 이전 '007'과 다른 결을 보인다. 유니버설픽쳐스 제공

눈물. ‘007’ 시리즈와는 거리가 멀었던 단어다. 1962년 ‘살인번호’로 첫선을 보인 이래 제임스 본드는 잘생기고 유머러스하며 바람둥이 기질이 다분한 첩보원으로 그려져 왔다. 수트를 입고 영국제 스포츠카 애스턴마틴으로 좁은 도로를 질주하는 모습은 그의 상징과도 같았다. 아비규환의 현장에서도 어떤 식으로든 빠져나오고, 불굴의 의지와 예리한 판단으로 악을 무너트리곤 했다. 요컨대 본드는 호쾌하고도 박진감 넘치는 남성적 면모로 60년 가까이 관객에게 쾌감을 선사했다. ‘007’은 눈물이라는 감성 어린 단어는 어울리지 않는 영화 역사상 최장 시리즈였다.

29일 오후 개봉한 새 시리즈 ‘007 노 타임 투 다이’는 다르다. 영화가 종점을 향할 무렵 슬픔이 스크린을 지배한다. 정서뿐 아니다. 시대 변화를 반영해 여러모로 달라진 면모를 보인다. ‘007’이지만 기존 ‘007’과 결이 완연히 다르다. ‘노 타임 투 다이’는 ‘007 카지노 로얄’(2006) 이후 본드로 열연해 온 대니얼 크레이그의 시리즈 마지막 출연작이다. 크레이그의 퇴장 선언으로 영화 공개 전부터 변화가 이미 예고됐으나 영화는 결말을 통해 명확히 선언한다. 앞으로 만들어질 ‘007’ 영화는 이전과 완연히 달라질 것이라고.


아름다운 풍광, 격렬한 액션

수트는 제임스 본드의 트레이드마크다. '007 노 타임 투 다이'에선 작전복을 입은 모습이 더 자주 등장한다. 유니버설픽쳐스 제공

영화는 본드가 영국 정보기관 MI6를 은퇴한 이후 이야기를 그린다. 본드는 연인 매들린(레아 세이두)과 이탈리아 중세도시 마테라로 여행을 떠난다. 달콤한 시간은 잠시. 국제 범죄조직 ‘스펙터’ 일행의 습격을 받고, 본드는 매들린이 꾸민 계략으로 의심한다. 매들린과 결별한 본드는 자메이카 한 항구도시에 묻혀 산다. 5년 후 스펙터 일행이 영국 런던 한 비밀연구소에서 치명적인 첨단 생화학 무기를 강탈해 가면서 본드는 미 중앙정보국(CIA) 요원의 요청으로 다시 현장으로 돌아오게 된다. 작전을 수행하면서 그는 MI6와 갈등하게 되고, 예기치 않게 매들린과 재회한다. 생화학무기의 행방을 쫓다 새로운 악당 사핀(라미 말렉)이 배후에 있음을 깨닫게 된다.

영화는 초반부터 눈과 귀를 사로잡는다. 마테라의 수려한 풍광을 배경으로 펼쳐지는 액션이 특히 유려하다. 본드가 애스턴마틴을 위험천만하게 운전하며 위기를 모면하려는 모습은 여전히 매력적이다. 카메라는 영국을 거쳐 자메이카, 노르웨이 등으로 이동한다. 아름다운 풍광에서 펼쳐지는 액션이 격렬하다. ‘분노의 질주’ 시리즈와 달리 차량 추격 장면은 현실감이 넘친다. 사실적이라 더 박진감 있다.


흑인 여성 007 요원의 등장

'007 노 타임 투 다이'에서 공식적인 007은 흑인 여성 노미(왼쪽)다. 유니버설픽쳐스 제공

‘노 타임 투 다이’에는 또 다른 007이 등장한다. 본드가 은퇴하면서 노미(라샤나 린치)가 요원 명칭을 물려받았다. 공식적으로 007인 그는 생화학 무기를 되찾기 위해 본드와 경쟁하면서도 협업한다. 노미의 등장만으로도 상징적이다. 007은 이제 백인 남성이 아닌 흑인 여성이기 때문이다.

노미는 본드걸로 표상됐던 ‘007’ 속 여성 이미지를 뒤집는다. 본드걸은 남성 관객을 위한 눈요깃거리였다. 본드에 반해 목숨까지도 내놓는 조력자이거나 본드를 유혹해 위험에 빠뜨리는 팜 파탈이었다. 노미는 다르다. 빼어난 첩보원으로 자신의 임무에 집중하고, 본드와 동등한 위치에서 일한다.

매들린과 신참 CIA 요원 팔로마(아나 디 아르마스)도 마찬가지다. 매들린은 그저 본드를 사랑하면서 자신의 삶을 살아가는 정신과 의사다. 팔로마는 이 영화에서 유일하게 노출 심한 의상(파티장에서 잠복근무를 해야 하니까 어쩔 수 없이)으로 등장하지만 임무만 수행한 뒤 퇴장한다.


여성 작가의 힘 드러나

'보헤미안 랩소디'로 오스카 남우주연상을 받은 라미 말렉이 '007 노 타임 투 다이'에서 악당 사핀을 연기했다. 유니버설픽쳐스 제공

일본계 미국인 케리 후쿠나가 감독이 메가폰을 잡았다. 영국인 아닌 감독은 시리즈 역사 최초다. 후쿠나가 감독은 ‘제인 에어’(2011)와 ‘비스트 오브 네이션’(2015) 등 여러 영화들로 연출력을 인정받았다. 미국 드라마 ‘트루 디텍티브’ 시즌1로 이름을 널리 알렸다. 시나리오 작가를 겸업하고 있는 그는 ‘노 타임 투 다이’의 시나리오 작업을 하기도 했다.

주목할 점은 피비 월러 브릿지의 합류다. 영국 배우이자 작가, 제작자인 월러 브릿지는 할리우드에서 최근 가장 주목받는 창작자 중 한 명이다. 인기 드라마 ‘플리백’과 ‘킬링 이브’ 극본을 썼다. 가부장제적 사고를 뒤집는 여성 서사로 화제를 모았던 작품들이다. 월러 브릿지는 ‘노 타임 투 다이’의 시나리오를 함께 썼다. 1960년대 조앤나 하우드 이후 ‘007’ 역사상 두 번째 여성 작가다.

영화는 163분 동안 결말을 향해 내달린다. 긴 상영시간을 참아내면 눈가에 물기가 어린 자신을 발견할 수 있다. 남성호르몬을 과다 분비하던 본드 캐릭터에 열광하고 전통적 ‘007’ 시리즈를 좋아했던 이들이라면 결말에 통탄할 수도 있다. ‘007’ 시리즈가 앞으로 어떻게 변할지 알 수 없다. 다만 한 가지는 분명하다. 우리는 21세기에 살고 있다. 12세 이상 관람가.

라제기 영화전문기자 wenders@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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